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는 1948년 평범한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총명하고 공부를 잘한데다 남다른 비판정신이 있었다는 것. 그는 학교에서 어느 혁명원로의 의견이 잘못됐다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해 교사를 놀래키기도 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었던 그의 인생은 고급관료의 딸과 교제하면서부터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재정무역부 차관의 딸과 결혼하다
왕치산이 태어난 곳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부모의 출신지인 조적(祖籍)은 산시(山西)성의 톈전(天鎭)이다. 왕치산 부총리의 부친은 칭화대를 졸업해 국무원 건설부 산하의 도시설계원의 고급엔지니어였다. 베이징에서 평범한 삶을 누리던 왕치산은 문화대혁명이 터진 이후 1969년 가족 모두가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하방(下放)됐다.
그는 2년동안 농민으로 살게 되는 과정에서 같은 지역으로 하방당한 야오이린(姚依林) 재정무역부 부주임(차관급)의 딸인 야오밍산(姚明珊)과 교제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야오이린은 1971년 대외무역부 부부장으로 복권된다. 그와 동시에 농촌에서 힘든 삶을 영위하던 왕치산은 편한 보직으로 유명했던 산시성 박물관으로 배치받는다. 이때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73년 시안(西安)에 위치한 시베이(西北)대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한다. 이후 졸업하고 나서도 산시성 박물관에서 1979년까지 근무했다. 이어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연구소에서 실습연구원으로 일했다. 그가 경제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80년이었다.
◆4군자로 불리며 경제에 눈떠
1980년 중국사회과학원 경제분야 연구생이었던 황장난(黃江南)은 중국의 경제구조가 붕괴직전이라고 여겼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정부의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해야 하며, 시기를 놓치면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황장난의 친구였던 리인허(李銀河)는 “네 주장을 정부지도층에 알려야 한다. 내가 적임자 한 명을 소개시켜주겠다”라며 왕치산을 추천했다. 당시 왕치산의 장인인 야오이린은 국무원 부총리였다.
그저 부총리의 사위를 만난다는 생각으로만 왕치산을 접한 황장난은 그의 총명함에 놀랐다고 한다. 황장난은 “왕치산은 당시 근현대사 연구소의 보조연구원이었다. 그는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몹시 총명하고, 학습능력이 뛰어나 경제분야의 토론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황장난은 친구였던 웡용시(翁永曦), 주자밍(朱嘉明), 그리고 새로 알게된 왕치산과 함께 경제정책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보고서는 1980년 경제는 쇠퇴기를 맞을 것이며 주요원인은 생산력부족이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포함했다.
당시 국가계획위원회의 국민경제예측자료는 6-8%의 성장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왕치산을 비롯한 4명의 연구원들은 마이너스성장을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다.
왕치산은 장인인 야오이린에게 보고서를 제출했고, 야오이린은 이를 천윈(陣雲) 당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게 보고했다. 보고서를 받아든 천윈은 “한명은 공학도고, 한명은 농업전공이고, 한명은 역사학도인데 이렇게 좋은 보고서를 써내다니”라며 감탄을 했고, 보고서는 자오즈양(趙紫陽) 당시 총리의 손에까지 갔다.
자오즈양은 보고서를 정독한 후 왕치산, 황장난, 웡용시, 주자밍 등 4명을 직접 불러 오후시간을 전부 할애해 그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그 자리에는 야오이린 등 국무원 영수들도 동석해 함께 토론을 벌였다.
이 네명은 이후 유명해져 사군자(四君子)로 불리게 된다. 1980년 여름에는 광둥(廣東)성 서기 런중이(任仲夷)이 왕치산과 황장난을 남쪽으로 불러 광둥의 경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그들은 광둥성정부 각 부문과 좌담회를 가졌으며 모든 청, 국과 회의를 하고, 이후 현, 시, 농촌, 군부대를 둘러본 다음 광둥성 경제발전전략에 대한 보고를 했다. 황장난과 왕치산이 제출한 보고서는 대부분 광둥성의 기본정책으로 채택됐다.
황장난을 만나면서 경제에 눈을 뜬 왕치산은 역사연구원을 벗어나 현실경제 최일선에 몸을 투신한다. 새로 둥지를 튼 곳은 중공 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 공산당원도 아닌 그였지만 장인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1983년 2월에야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농촌문제전문가인 원톄쥔(溫鐵軍)은 “모두들 왕치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왕치산은 역사의식이 있었으며 주도면밀했고 세심했다. 왕치산과 함께 일한다면 그 어떤 다른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실행하기만 하면 됐다. 겸허하고 공부하길 좋아하며 명랑하고 민주적이었고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에서 장점을 발견하는 데 발군의 능력이 있었고, 지도자의 자질이 뛰어났다”고 회고했다.

◆금융통으로의 화려한 변신
농업정책연구원에서 농업문제를 연구하던 왕치산은 1988년 중국 최초의 전국단위 민간농촌금융기구인 중국농업신탁투자공사를 조직해 총경리와 당위원회서기를 맡는다. 이때부터 그의 은행가로서의 경력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9년 천안문사태가 벌어지자 중국 당국은 고관대작 자제들의 사업을 전면 금지시켰다. 왕치산은 국유투자회사에 있었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총경리직을 사임하고, 부총리인 장인의 도움으로 그는 국영은행인 중국인민건설은행 부행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1990년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하나의 날개를 더 달게 된다.
1993년 국무원 부총리이던 주룽지는 중앙은행장을 겸직한 후 왕치산을 인민은행 부행장으로 발탁했다. 왕치산은 다음해 중국인민건설은행행장에 취임했다. 당시 왕치산은 커다란 업적을 남긴다. 건설은행과 미국의 모건스탠리와의 합작을 통해 중국국제금융공사(CICC)를 만든 것. CICC는 중국대륙 최초의 진정한 투자은행으로, 국유 중대형기업의 구조개혁과 해외융자등과 관련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아직도 중국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중국의 초특급 소방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자 주룽지는 당시 금융위험으로 어려움을 겪던 광둥성에 왕치산을 ‘구원투수’격으로 투입시킨다. 광둥성 부성장으로 임명된 왕치산은 그 곳의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왕치산은 중국의 ‘초특급 소방수’ ‘폭탄해체반’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2002년에는 부동산거품문제가 심각했던 하이난(海南)성 서기로 부임해간다. 하이난에서 착실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왕치산은 이듬해 베이징 시장으로 차출된다. 당시 베이징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인 사스(SARS)가 창궐하면서 극도의 혼란상을 보였다.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하룻밤에 수만명이 탈출하면서 대혼란이 빚어졌다. 사소한 돌발사태라도 대규모 소요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관리들은 사태를 수습하기보다는 감추기에만 주력했고 민심은 더욱 동요했다.
중국 지도부는 이 사태를 해결할 적임자로 광둥성에서 과감함을 보인적이 있으며 인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왕치산을 낙점했다. 이 인사조치는 주효했다. 난팡르바오(南方日報)는 당시 사설에서 “불안과 공포, 아비규환으로 뒤덮힌 성안에 황제가 무림고수 한명을 투입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안 백성들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갔다”는 비유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베이징 시장에 임명된 첫날 그는 “1은 1이고 2는 2다. 군대에서는 농담을 하지 않는 법(軍中無戱言)”이라며 “절대 사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 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보고하라”며 혼란사태의 근본이 사스 자체보다 당국에 대한 시민의 불신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정확한 상황을 설명하며 신뢰를 호소했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방역과 환자격리에 최선을 다했다. 사스사태는 결국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왕치산은 이 일로 인해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해 11월 왕시장은 여론조사 기관인 링디엔(零點)이 전국 20개 주요도시 및 현 지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지지도 조사에서 최고인 70.5%의 지지율을 획득했다. 그것도 평균 58%보다 무려 12.5% 포인트나 높은 지지율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2007년 11월29일 그가 베이징 시장을 궈진룽(郭金龍) 안후이성 당 서기에게 물려줄 때 선웨웨(沈躍躍)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은 “왕치산 동지는 2003년 사스 발생 당시 베이징 시장을 맡아 5년간 베이징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지혜와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2008년 3월 국무원 부총리에 임명돼 중국의 무역과 금융을 관장하고 있다. 특히 2008년 말에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를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또한 그는 위안화 국제화의 초석을 다졌으며 미국과의 무역갈등을 최소화시키면서 무난하게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 이 같은 업적과 신임을 바탕으로 2012년 10월에 있을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무난히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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