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6>위정성-②현대사 목격한 중국 최고의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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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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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중국인들에게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빼어난 일가를 꼽으라면 마오쩌둥(毛澤東) 가족도, 덩샤오핑(鄧小平) 가족도, 장제스(蔣介石) 가족도 아닌 위정성(兪正聲) 상하이 서기의 가족을 꼽는다. 위정성 일가의 인맥은 여느 다른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 같은 가맥은 위정성 본인의 가장 큰 정치자질이기도 하다. 위정성의 가족은 외세의 침탈과 청나라 패망, 군벌의 득세, 일제침략, 국공내전, 신중국탄생,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중국의 굴기를 권부의 핵심에서 목격해왔다. 위정성의 정치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증조부까지 올라가야 한다.

◆태평천국 진압한 쩡궈판의 사돈

위정성의 증조부인 위밍전(俞明震, 1860—1918)은 청나라 말기의 정치인이자 문학가다.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탕징쑹(唐景崧)의 타이완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위밍전은 청나라 세금총국국장을 지냈으며 간쑤(甘肅)성의 관료를 역임했다.

그리고 난징(南京)에서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의 교장을 맡았다. 1898년 18세의 루쉰(魯迅)은 이 학교에 입학해 위밍전의 학생이 된다. 루쉰은 그가 아끼던 제자였다. 루쉰은 그의 저작인 ‘루쉰일기’에서 위밍전의 호를 여러 번 언급하며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류밍전은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하고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쩡궈판(曾國藩, 1811-1872)의 손녀인 쩡광산(曾廣珊)과 혼인한다. 쩡광산은 쩡궈판의 차남인 쩡지쩌(曾紀澤)의 딸이다.


◆국민당 총통 장제스와 사돈

3형제중 장남이었던 위밍전의 막내동생인 위서우천(俞壽臣)의 아들인 위다웨이(俞大維)는 장졔스(蔣介石)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위다웨이는 하버드대학 철학과에서 학위를 받았고 독일 유학 시절에는 아인슈타인의 지도를 받았다. 군인이 되는 게 소원이었던 그는 귀국 후 국민당의 군문에 투신한다.

장제스가 위다웨이를 중용한 것은 지연의 힘이 크다. 장제스와 위다웨이는 모두 저장(浙江)성 출신으로 장제스의 고향인 펑화(奉化)와 위다웨이의 고향인 샤오싱(紹興)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1950년대 중반 중공의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으로 국공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될 때 대만의 국방부장이 위다웨이였다. 그는 “내가 갈 수 없는 곳엔 부하도 보낼 수 없다”라며 전장을 누볐다.

위다웨이의 아들인 위양허(俞揚和)는 장징궈(蔣經國)의 유일한 딸인 장샤오장(蔣孝章)과 결혼한다. 장징궈는 장제스의 장남으로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한 후 총통대리로 있다가 1978년 국회에서 정식으로 총통에 선출되었으며 1984년 재선됐다. 위양허의 아들인 위주성(俞祖聲)은 현재 장제스 가문의 제4세대 중의 중요한 인물이다. 위주성은 위정성과 6촌간이 된다.

위밍전의 장남인 위다춘(俞大純)이 위정성의 조부다. 위다춘은 일본, 독일에 유학했으며, 귀국한 후 북양 군벌 정부의 공업국장, 국민당 정부시절 철도국 국장 등 직무를 역임하였다. 위다춘에게는 4남2녀가 있었으며, 그 중 셋째가 위치웨이(俞啟威)로 위정성의 아버지다.

◆마오의 넷째 부인 장칭의 옛연인

1913년 생으로 저장(浙江)성 출신인 위치웨이는 공산 혁명활동에 가입하면서 이름을 황징(黃敬)으로 개명했으며, 산둥성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해 칭다오(靑島)시 공산당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당시 훗날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이 되는 장칭을 만나 한동안 동거생활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둥성 출신으로 본명이 리윈허(李雲鶴)인 장칭(강청)은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고향을 떠나 톈진(天津)에서 담배공장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뒤에 신극 배우가 되어 베이징(北京), 칭다오(靑島)와 농촌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던 중 황징을 만났다. 황징의 권유로 1933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장칭은 황징과 헤어진 뒤 상하이(上海)에서 ‘란핀’(藍蘋)이라는 예명으로 갖고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중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옌안(延安)으로 탈출했으며 그곳에서 마오쩌둥과 만났다. 장칭이라는 이름은 마오가 결혼하면서 지어 준 것이다.



◆덩의 장남과 죽마고우

황징과 판진은 2남1녀를 뒀다. 첫째는 위창성(俞強聲)이고, 둘째가 위정성이다. 딸은 문화대혁명시절 박해를 받고 자살했다. 위창성은 베이징 국제관계학원을 졸업한 후 베이징시 공안국에 배치된다. 1983년 중국 국가안전부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이후 1985년 국가안전부 간부의 신분으로 돌연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왜 미국으로 망명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위창성은 미국 중앙정보부(CIA)에서 신분을 위장한 채 40년간 중국 스파이로 암약해왔던 진우지(金無忌)의 신분을 폭로하고, 진우지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살한다. 위창성은 이후 이름을 위전산(俞真三)으로 바꿨으며 남미의 어떤 국가에 도착하여 여행할 때에 실종된다.

위창성의 배신으로 덩샤오핑은 대노했고 국가안전부장을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문책인사를 가했다. 형의 망명으로 낙담해 있던 위정성을 독려해 준 이는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鄧樸方)이었다.덩푸팡은 위정성에게 “너무 심려 마라.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했다.

덩푸팡은 위창성과 고등학교 동기며, 위정성과도 어린시절을 함께 보냈다. 덩푸팡이 문화대혁명 시절 고문을 당해 척추에 손상을 입었을 때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이 위정성이었다.

◆장쩌민과 2대에 걸친 인연

위정성의 부친인 황징이 1950년대 제1기계공업부 장관을 맡는 기간에 그 수하에서 일한 사람이 바로 장쩌민 전 주석이다. 황징은 장쩌민이 소련으로 유학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줬고, 장쩌민은 그런 황징을 존경했다고 한다.

장 전 주석이 1980년대 초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재직할 때 위정성은 그의 직속부하직원인 부사장(副司長, 부국장)으로 근무했다. 장쩌민 역시 위정성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덩푸팡이 중국 장애인 복지기금회를 만들려 하면서 위정성을 데려다 쓰려 했으나 처음엔 장쩌민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덩은 자신의 ’두 다리‘가 되어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계속 간청했고, 결국 장쩌민은 위정성을 덩푸팡에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군출신 위정성의 장인

위정성의 아내 장즈카이(張志凱)는 전 국방 과학기술공업위원회 부주임 장전환(張震寰) 장군의 딸이다.

장전환은 1961년에 소장으로 진급한 후 원자탄, 수소폭탄, 탄도미사일 등을 시험하는 조직의 책임자였다. 그는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일선에서 지휘했다.

장즈카이는 1944년생으로 위정성보다 한살 위다. 둘은 하얼빈군사공업대학 동문이다. 위정성이 옌타이시장으로 옮겨가자 그녀는 옌타이시 경제위원회 주임을 맡는 등 활약을 하다가 창청(長城)컴퓨터로 자리를 옮겨 회장직까지 올라간다.

위정성에게는 아들이 한명 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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