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9>장가오리-①과묵한 성격의 당대 최고 목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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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5-0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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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성 = 베이징특파원) “그의 대중연설은 생기가 없어 듣고 있으면 우울해진다. 또한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공무원으로서의 업무역량은 중국에서 따라갈 자가 없다고 봐야 한다.” 중국의 한 정치학과 교수의 장가오리(張高麗) 텐진(天津)시 서기에 대한 평가다.

그는 말수가 적고 본인홍보에 약해 보통때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성실하고 업무능력이 탁월하며 정치적인 감각 역시 뛰어나 중요한 일이 생길 때면 사람들이 찾게 된다. 부여된 임무를 항상 초과달성해 오면서 상급 지도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왔다. 때문에 인사공백이 생기면 빠짐없이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시멘트를 나르던 노동자에서 시작해 선전(深천<土+川>)시 서기, 산둥(山東)성 서기, 텐진시 서기까지 올라오게 된 것은 그의 빼어난 업무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난 2007년 중국 최고의 정치적 이벤트였던 상하이시 서기 선임 때에도 장가오리는 후보군에 올랐가 있었다. 당시 류옌둥(劉延東)과 시진핑(習近平), 리위안차오(李源朝) 등과 경합을 벌였지만 결국 그는 시진핑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시진핑은 당시 상하이(上海)시 서기에 올라서면서 강력한 차기지도자로 부상했다. 장가오리는 대신 그해 10월 있었던 17차1기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됐다.

푸젠(福建)성 연해에서 태어나 선전, 광둥(廣東)과 산둥(山東)에서 요직을 맡아온 장가오리는 남에서 북으로 바다를 따라 움직였으며 경력이 풍부하고 주장삼각지와 환발해지역 등 중요한 두가지 경제구역에서 장기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장가오리가 텐진에 온 이후 두가지 임무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지역내의 부패청산이었다. 이 두가지 항목은 중국공산당의 난제였다. 텐진에서 근무한 4년여동안 장가오리는 많은 청렴한 정책들을 폈다. 그동안 많은 공무원들이 비리행위로 낙마했다. 또한 톈진의 경제발전 역시 양호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 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장가오리는 향후 중국 지방관리의 모범으로까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가오리는 2012년 10월에 예정된 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한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길 꿈꾸고 있다. 그의 목표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출해, 전국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등 기구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능력이나 경력면에서 그는 충분히 상무위원 자격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석유방

중국정가에는 석유방(石油幇)이라는 당파가 있다. 석유방은 석유업종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 정가에서 맹활약하면서 구성됐으며 과거 대형 국영석유기업들의 이권에 관여하면서 형성된 자금력을 토대로 강한 정치력을 발휘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쩡칭홍(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을 들 수 있다.

쩡칭홍 전 국가부주석은 지역을 기준으로 상하이방, 출생을 기준으로 태자당으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석유방의 수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쩡칭홍은 과거 석유산업에서 오랜기간 근무해 산업에 풍부한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제1대 석유방은 위추리(余秋里)와 캉스언(康世恩)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나란히 부총리까지 올라갔다. 쩡칭홍은 이들을 선배로 지극히 모셨다고 한다. 제2대로는 천진화(陳錦華) 전 정협부주석과 성화런(盛華仁) 전 전인대 부위원장을 꼽을 수 있다. 제3세대로는 중국해양석유의 총재를 역임한 웨이류청(衛留成) 하이난(海南)성 서기와 시노펙의 총재였으며 공업정보화부 부장을 지낸 리이중(李毅中)을 들 수 있다. 장가오리도 3세대에 속한다.

2세대로 분류되는 쩡칭홍은 젊은 시절 행정부인 국무원 석유부(石油部)에서도 일했고 중국해양석유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같은 석유계통 근무경력으로 쩡칭홍 국가 부주석과 한층 가까워진 인물이 현재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周永康)이다.

정법위원회 서기는 정부의 감찰 부문을 지휘하고, 중앙군사위원회와함께 인민무장경찰을 통솔한다. 우리나라의 법무부장관 격이면서도 최고인민법원 원장(최고재판소 장관)까지도 지휘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닌다.

저우융캉은 정계로 빠지기 전까지 주로 페트로차이나(중국석유천연가스)의 유전에서 근무했고 페트로차이나 회장까지 지냈다. 페트로차이나, 시노펙(중국석유화공), 중국해양석유의 이사장과 총재 대부분이 쩡칭홍 전 부주석과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가 직간접적으로 키운 인물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공업정보화부 부장이었던 리이중은 시노펙 이사장을 지냈으며 저우융캉과 대학 동기동창이다. 또 하이난 서기인 웨이류청 역시 중국해양석유 CEO로 있다가 하이난성 성장으로 발탁, 고위 관료의 길로 진입했다. 쩡칭홍의 옛 직장 부하였던 인물이다.

현재 베이징 부서기로 있으며 제6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히고 있는 왕안순(王安順) 역시 중국의 동북지역 유전에서 근무했던 석유방이다. 쩡칭홍 국가 부주석이 매우 신임하는 인물로 당에 들어와서는 인사를 담당하다 현재는 북경의 치안 총책임자로 있다. 랴오닝(遼寧)성 조직부장을 지냈으며 최근 푸젠성 부성장으로 영입된 수쑤린(蘇樹林)은 시노펙 총경리 출신이다. 칭하이성(靑海省) 부성장을 지내다 현재 페트로차이나 이사장으로 있는 장졔민(蔣潔敏) 역시 쩡칭홍을 정점으로 저우융캉이 집중 육성한 인물이다.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위원회 서기 역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산둥화공석유공업청에서 청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광의의 석유방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막후의 실력자인 쩡칭홍, 수사권과 사법권을 꽉 틀어쥐고 있는 허궈창과 저우융캉, 공업정보화 부장이었던 리이중, 자원개발의 요충지인 하이난성 서기 류청웨이, 차차기 지도자로 부상한 쑤수린 푸젠성 부성장, 베이징 치안총수인 왕안순 그리고 석유산업 중앙 국유기업 3사의 최고 경영자들이 모두 같은 계보로 이어지는 석유방들이다.

◆쩡칭홍에 이은 차기 석유방 영수

장가오리 역시 석유방이다. 내년 당대회에서 장가오리가 상무위원에 등극한다면 그가 석유방의 영수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장가오리는 석유방의 관계가 비교적 얕을 수 있다. 그가 석유산업에 근무한 것은 15년이지만, 기층기업에서 책임자까지 밖에 승진을 못했기 때문에 접촉했던 인사들에 한계가 있고, 석유방의 관계망 역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석유방 인사들 중 차기 지도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인물로 장가오리가 꼽히는 만큼 석유방 네트워크를 가장 잘 이끌 수 있으며, 중국의 국영 석유업체들의 발전을 가장 잘 인도할 수 있는 인물로 나서게 되며 결국 그가 석유방을 이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선전시에서 산둥성 서기로 올라오는 과정에서도 쩡칭홍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장쩌민에게 건의해 산둥으로 올리자고 했으며, 장가오리를 신임하고 있던 장쩌민 역시 흔쾌히 승락했다는 것. 쩡칭홍은 산둥성에 아무런 연고도 네트워크도 없던 장가오리를 측면에서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쩡칭홍은 당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명의로 산둥성위원회에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산둥성위원회, 성정부, 성인민대표대회, 성정치협상회의 등의 조직은 무조건적으로 장가오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불복종하거나 항명하거나 장가오리를 난처하게 하는 자는 그 즉시 해임시키겠으며 이 원칙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었다.

◆장쩌민과의 태산등정

장가오리는 장쩌민과의 신뢰감도 깊다. 이미 장쩌민은 장가오리가 선전시 서기로 재직할때부터 그를 눈여겨 봤다.

장쩌민은 2000년도에 두차례나 선전을 방문했다. 2월에 시찰할 때에는 “선전이 돈을 벌 때는 그 근원이 어디있는지를 생각하고, 부자가 된 후에는 어떻게 나아갈지를 생각하라”며 “새로운 우세를 더 만들어 한층 더 높이 올라가고, 앞장서서 사회주의 현대화를 실현하라”고 격려했다.

당시 인민일보는 “장쩌민은 선전의 경제발전과 도시건설과 인민물질문화생활발전의 거대한 변화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고 기술했다.

그해 11월 선전경제특구 건립 20주년 경축대회에 참석한 장쩌민은 “경제특구는 계속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선도자가 돼야하고, 중국의 특색, 중국의 품격, 중국의 기개를 담아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가오리는 말끝마다 ‘3개 대표이론(3개대표, 장쩌민의 정치이론)’을 말하고 발언할때마다 ‘총서기의 당부’를 빼놓지 않았다. 또한 장쩌민의 연설을 그대로 인용하며 실천에 옮겼다. 동시에 그는 당시 광둥성 서기인 리창춘에게 항상 깍듯했고, 지시에 복종했다. 이 같은 처신으로 그는 상하이방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듬해 산동성으로 옮겨가게 된다.

장가오리가 장쩌민과 함께 태산을 함께 오른 일화는 유명하다. 미신을 신봉하는 장쩌민은 1989년 텐안먼사태가 나기 전날 산둥성 타이안(泰安)시의 서기인 쑹파탕(宋法堂) 과 함께 태산에 올랐다. 태산에 있는 사찰인 비샤사(碧霞寺)에는 굉덕택민(宏德澤民,덕이 흥해 인민생활이 윤택해진다)이라는 현판가 있었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장쩌민의 덕이 천하에 미친다라는 식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장쩌민은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 총서기에 올라선다. 이후 장쩌민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태산을 자주 찾는다.

장쩌민이 퇴임한 2003년 이후 태산을 다시 찾았을 때는 당시 산둥성 서기였던 장가오리가 친히 영접을 나왔다. 당시는 5월1일 노동절로 태산을 찾으려는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다. 장가오리는 태산의 출입을 막고 타이안시의 공무원들은 물론 지난(濟南)의 청급 간부를 모두 소집해 장 전주석의 환영행사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장쩌민은 전당, 전군, 전인민의 가장 경애하는 위대한 영수”라고 다같이 외쳤다. 장쩌민을 마오쩌둥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듯한 구호였다. 장가오리의 장쩌민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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