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중국 권부의 핵심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아직까지 여성에게는 불모지로 남아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네번째 부인으로, 문화대혁명 시절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장칭(江靑)도 마지막 직함은 정치국위원에 그쳤었다. 철낭자(鐵娘子)로 불리며 중국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우이(吳議) 전 부총리도 2007년 정치국 위원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그 후 5년이 지나 새로운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선출되는 2012년. 중국에는 또 한 명의 강력한 여성 상무위원 후보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우이 전 부총리가 남성적인 카리스마와 강한 결단력, 그리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승승장구했었다면, 우이의 뒤를 이어 내년 상무위원 선거에 나설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은 여성적이며, 온화하고, 따뜻한 리더십을 내세우고 있다. 그의 강점은 부드러운 리더십과 광범위한 인맥, 홍콩 마카오지역에 정통한 커리어역량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여성으로서의 상징성은 그의 가장 큰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과거 장칭, 예췬(葉群), 덩잉차오(鄧潁超) 등 3명의 여성이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다. 이들은 각각 마오쩌둥과 린뱌오(林彪)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아내들로 남편의 후광을 업고 정치국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장칭이 실각한 1976년 이후에는 정치국에 여성의 명맥이 끊어졌다가 2002년 후진타오 주석이 공산당 총서기로 들어서면서 우이 전 부총리를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2007년 우이 부총리의 은퇴와 함께 류옌둥 당시 중앙통일전선부 부장이 정치국위원에 올라섰으며, 이듬해인 2008년 3월 국무원 국무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진타오 주석이 25명의 정치국 위원 중 한 자리를 여성몫으로 배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초의 여성 상무위원 탄생하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강화되고 있고, 각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차기 지도부는 정치국이 아닌 상무위원회 역시 여성의 진출이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 만약 상무위원 9명중 1자리를 여성에 배려한다면 그 1순위가 바로 류옌둥이다.
배려 차원이 아니라도 능력 면에서 류옌둥은 충분히 상무위원에 올라설 자격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최고위층의 승진인사는 당시의 사회분위기,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류옌둥에게는 천운(天運)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가 상무위원에 올라선다면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이 유력시 된다. 그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전국정협 상무위원이었으며,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전국정협 부주석을 겸임했던 경험이 있다. 또한 그는 조화의 리더십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반대정파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정협 주석직이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를 놓고 위정성(兪正聲), 장더장(張德江), 왕양(汪洋) 등과의 경합이 예상된다.
그가 강한 경쟁후보들과의 경합을 뚫고 상무위원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가지의 전제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상무위원 탄생에 대한 정치적 수요가 존재할 만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떤 식으로든 조성돼 있어야 하며, 두번째는 그가 국무위원으로서 5년여 근무했던 커리어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방경력 없는 것이 ‘옥의 티’
류옌둥은 현재 교육, 문화, 체육, 과학기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국무위원이다. 현재 중국 국무원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필두로 네명의 부총리와 다섯명의 국무위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 각 부 부장(장관)들이 배치돼 있다.
원자바오 총리와 리커창(李克强) 상임 부총리, 후이량위(回良玉) 농업 수자원 담당 부총리, 장더장(張德江) 산업 에너지 교통 통신 담당 부총리, 왕치산(王岐山) 무역 금융 담당 부총리는 모두 정치국 위원이다. 류옌둥은 정치국위원이면서 국무원 부총리에 들지 못한 채 국무위원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가 맡고 있는 교육, 문화, 체육, 과학기술은 언론의 스폿라이트나 대중의 관심사에도 한발 비켜나 있다. 무난하게 임기를 채우기에 알맞은 분야기도 하지만, 나름의 성과를 내기에는 '2% 부족한'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지방에서 근무한 경력도 없다.
중국 베이징의 한 정치학자는 “류옌둥의 학력이나, 배경, 정치력, 인맥, 사상, 야망 등은 이미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업적이 부족하고 지방정부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의견을 냈다.
◆장쩌민, 쩡칭훙과 깊은 인연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생부(生父)는 장스쥔(江世俊)이다. 그는 장 전주석을 딸만 둘이었던 동생 장상칭(江上靑)에게 양자로 보낸다. 장상칭의 원래 이름은 장스허우(江世侯)다. 장상칭은 일찍이 혁명에 참가한 류윈둥의 부친인 류루이룽(劉瑞龍)의 소개로 1927년 중국 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했고, 2년 뒤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정식 가입하면서 혁명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류루이룽은 훗날 농업부 상무부부장을 지냈다. 류루이룽과 장쩌민의 양아버지 장상칭은 생사를 함께 한 친구였으며, 이 인연으로 류옌둥은 장쩌민과 어린시절부터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류옌둥은 혁명원로들의 자녀들이 다니던 화동보육원(華東)을 다녔다. 보육원의 원장은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의 어머니인 덩류진(鄧六金)이었다. 류옌둥은 어린시절 보육원에서 만난 쩡칭홍을 ‘오빠’라고 부르며 친하게 어울렸다고 한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류옌둥이 톈안먼사태로 인해 위기에 몰렸을 때 그를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톈안먼사태가 발생한 1989년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류옌둥은 대학생들에게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리위안차오(李源朝, 현 중앙조직부 부장)와 함께 공청단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장쩌민과 쩡칭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류옌둥을 통전부 부부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
◆후진타오와의 더(?) 깊은 인연
그녀는 공청단 출신으로 후진타오 주석을 오랜기간 보좌했었다. 때문에 공청단파 핵심멤버라고 볼 수 있으며, 현재 리커창, 리위안차오 등과도 교분이 두텁다. 그녀는 1982년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후 주석과 함께 일하면서부터 출세 길이 열렸다.
그는 1984년까지 후 주석과 함께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근무했다. 1983년부터는 전국청년연합 부주석을 맡아 전국청련 주석이었던 후진타오와 손발을 맞췄다. 1985년 4월 후진타오가 구이저우(貴州)성 당 서기로 발령 나자 전국청련 주석 직을 물려받았다.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치자면 같은 공청단파 가운데 리커창이나 리위안차오보다 더 밀접한 셈.
2006년에는 천량위(陳良宇) 당시 상하이시 서기의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2005년 로이터통신은 공청단파 핵심인물인 류옌둥이 상하이시 서기로 갈 것이라고 보도했고, 2006년에는 대만의 한 언론이 류옌둥이 상하이시 서기를 맡고 자오러지(趙樂際)가 상하이시 시장을 맡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기사를 싣기도 했다.
결국 2007년 상하이시 서기 자리는 시진핑(習近平)에게 돌아갔지만, 상하이시 서기 인선에 2년간 계속 류옌둥이 거론된 것은 그가 후진타오 주석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