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13>왕후닝-장쩌민의 ‘3개대표’ 만든 최고 브레인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마르크스ᆞ레닌주의,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덩샤오핑(鄧小平) 이론,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이론’, 후진타오(胡錦濤)의 ‘과학적발전관’. 이 다섯가지는 중국 공산당 당장(黨章)의 총강(總綱, 전문)에 적시돼, 공산당원들은 물론이고 중국 전체 인민들이 행동지침으로 삼아야할 가치관들이다.

공산당 당헌이 열거하고 있는 다섯가지의 사상 중 두가지는 한사람의 손을 거쳤다. 왕후닝(王滬寧)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장쩌민의 3개대표이론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후진타오의 과학적발전관의 탄생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명실공히 중국 정치계 최고의 브레인으로 꼽히고 있는 왕후닝은 장쩌민, 후진타오 지도부에 이어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는 차기지도부에서 무난하게 정치국위원에 진입할 것으로 보이며, 중앙선전부장이나 주요 성(省) 서기로의 이동이 점쳐지고 있다.

이미 그는 시진핑을 도와 새 지도부에 맞는 정치이념을 가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 지난 2009년 17기4중전회에서 심의를 통과한 ‘새로운 형세 하에서 당의 건설 강화와 개혁진전에 대한 결정’도 왕 주임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시진핑이 직접 설명한 이 결정은 계획경제하의 공산당이 특권을 대변했다면 개혁개방 하의 공산당은 부패를 대변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서 당내 민주화와 이를 위한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패일소와 민주화가 최근 중국정치계의 화두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시진핑 역시 이를 포함하는 정치적 비전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왕후닝을 중용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민주화, 계획성장 이론적 근거 제시

왕후닝은 자신의 저서인 ‘정치적인생’에서 민주화에 대해 “민주정치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이며, 사회발전의 과정에서 민주정치를 적절하게 발전시켜 인민들을 이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해야 한다”면서 “민주화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하든, 우회적으로 대응하든 이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국 사회안정의 중요한 조건이다”고 의견을 밝히고 있다.

왕후닝은 “정치체제는 일정한 역사ᆞ사회ᆞ문화적 조건에 맞아야 하고,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 중국의 역사적 단계와 조건을 뛰어넘어 이뤄질 수 없다. 생산력(경제) 발전을 먼저 이루고 이를 주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야만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나무를 접붙이듯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룩할 수 없다”는 이론은 중국 정치인들의 민주화에 대한 의견에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

왕 주임은 앞서 1980년대 중반 ‘중국의 경제개혁은 반드시 중앙권력의 집중을 필요로 하고 정부의 역량에 의해 추진돼야 하며,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의 4마리 용(龍)은 이런 과정을 거쳐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신권위주의 이론’을 발표해 정부주도 경제개혁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 



◆“저는 독서인입니다”

조적(祖籍)이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시인 왕후닝은 1955년 10월6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철학과 정치서적을 좋아했으며,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고 한다. 74년 화둥(華東)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3년간 전공했지만 외교 계통으로 나가지 않고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를 마쳤다. 그는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1994년에는 푸단대 법학원 원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한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전 그냥 독서인(讀書人, 책 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좋은 책 몇 권 읽고, 좋은 학생 몇 명 가르치고, 좋은 책 몇 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을 폭넓게 읽어선지 그의 논문은 심도 있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논문은 중국의 당대 지도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 데다 친절하게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저우치(周琪)의 아버지는 국가안전부 상하이지국의 핵심인사로, 왕후닝의 이론을 공산당에 자주 보고했다. 왕후닝의 논문은 당시 정치가들의 구미에 딱 맞는 내용들이었기에 그의 이론은 지도층들의 연설문에서 자주 인용됐고 훗날 그가 베이징에 입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후 그는 1998년 12세 연하의 후난(湖南)성 출신 푸단대 학생 샤오자링(蕭佳靈)과 극비리에 결혼했지만 이혼의 절차를 밟은 것으로 전해진다.

◆장쩌민의 초일류 정치참모

줄곧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5년 베이징(北京)의 중앙정책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쩡칭홍(曾慶紅)과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적극적인 천거에 힘입은 결과다.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을 거쳐 19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을 역임했다. 왕후닝은 정책연구실 정치조장으로 있을 당시 장쩌민의 정치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그가 역점을 두었던 것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에 비해 무게가 떨어지는 장쩌민을 국제감각이 있고 대중 친화적인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1997년 11월 AP통신은 장쩌민이 중국을 방문중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웃으며 온 몸으로 껴안는 장면을 보도했다. 이 사진은 소련 붕괴 후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이는 왕후닝의 계산에 따라 연출된 것이었다.

왕후닝의 ‘장쩌민 새 이미지 만들기’ 작업이 절정에 달한 시기는 장의 미국방문기간이었다. 1997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계속된 방미 기간 장쩌민은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풍성한 뉴스를 생산해 냈다.

10월29일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장 주석은 백악관 기자회견장에서 톈안먼(天安門)사태를 놓고 클린턴과 예정에도 없던 즉석 토론을 벌였다. 이 ‘보기 드문’ 장면은 CNN 방송을 통해 미국인 가정과 전 세계에 생중계 됐다.

방문 첫날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갑작스럽게 수영을 했는가 하면 마지막 날에는 LA공항에서 뛰다시피 트랩에 올랐다. ‘돌출행동’에는 장쩌민의 음악실력도 ‘동원’됐다. 하와이 주지사 만찬장에서 즉흥 기타연주를 했고, LA화교 주최 연회에서는 무반주로 경극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장쩌민의 일련의 행동이 “정력적이고 현대 감각을 지닌 세련된 중국 지도자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미국인에게 심어 주는데 기여했다”라는 것이 당시 홍콩 언론의 평가였다.

이는 왕후닝 ‘감독’에 장쩌민 ‘주연’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장쩌민은 방미에 앞서 왕후닝의 조언에 따라 상하이에서 수일 동안 여러 경우의 수를 상정, 실전 대비 연습까지 했던 것.

◆장쩌민의 3개대표를 완성하다

‘3개 대표론’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발표한 것으로 공산당이 △선진 생산력(자본가) △선진문화 발전(지식인) △광대한 인민(노동자ㆍ농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며, 이를 만들어낸 것이 왕후닝이다.

‘3개 대표론’은 2000년 2월 장쩌민이 광둥성 가오저우(高州)시를 시찰하면서 “당의 생존을 위해서는 ‘3개 대표’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첫선을 보였다. 발언 당일에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했고, 광둥 현지 언론들 역시 보도하지 않았으나 상하이(上海)에서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학습열풍이 불면서 2001년말까지 당정 간부학습을 통해 장 주석의 사상으로 굳혀졌다.

장 주석은 이 이론에 근거해 2001년 여름 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을 기념한 ‘7ᆞ1 강화(講話)’에서 민간기업인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이어 9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5기 전국대표대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3개 대표이론을 지지하는 ‘당기풍 건설강화 및 당중앙결정’을 채택하도록 했다. 2002년 11월 열린 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3개 대표’ 이론이 공산당의 당규약(黨章)에 삽입됐다.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왕후닝은 2002년 11월 16대에서 퇴임하는 장쩌민에 의해 정책연구실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승진 발탁되었으나 후진타오 세력에 의해 한동안 찬밥 취급을 받았다. 사회과학원 부원장 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어 중앙당교 부교장 직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에 깊숙히 관여하면서 후 주석과 공청단파의 신임을 얻게 된다. 과학적 발전관은 종래의 경제발전 지상주의에 의해 빈부격차가 심화됐고 환경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후진타오 지도부가 일관하여 내세우는 전략적 사상기반으로 2004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됐다. 이론적 토대를 만드는데 왕후닝 역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장쩌민의 사람’이었던 왕후닝은 후진타오의 집권 2기인 17대에서 후의 최측근인 링지화(令計劃) 판공청 주임, 그리고 리위안차오(李源朝) 조직부장과 더불어 당의 일상업무와 정책의 실행을 담당하는 중앙서기처의 서기를 겸하고 있다. 6인으로 구성된 서기처의 수장은 시진핑으로 평소 왕후닝과 수시로 의견교환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가 시진핑시대에서도 승승장구할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제3회 보훈신춘문예 기사뷰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