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덩사오핑은 ‘婦女能頂半邊天(부녀능정반변천·인민의 반은 여성이다)’이라고 했다. 즉 여성들도 하늘의 반쪽을 받칠 수 있다며 양성평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의 한 고위 여성 간부는 중국 정치계의 여성 간부 수는 많지 않고 여성장(省長·도지사 급)의 수도 손가락으로 꼽힐 만큼 여전히 여성이 정치 간부로 진출 하기는 쉽지 않다고 중국 언론을 통해 밝혔다.
유독 외교가만이 여성 파워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현재 중국 외교부 대변인인 장위 외교관(부국장급)도 6자회담 준비과정 중 그 능력을 인정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이런 중국 외교가에는 현 대변인의 전임자인 푸잉(傅塋) 부부장이 오늘의 중국 외교부의 '입심'을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된다. 또 장치웨(章啓月) 전 대변인은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中 외교가(家)의 여성파워
2010년 중국 통계에 따르면 중국외교부 공무원 수는 약 5200여명 정도다. 이 중 여성은 1600여명으로 전체 외교부 공무원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이는 한국보다 2배정도 높은 비율이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2008년 기준 한국 외무공무원 중 14.6%만이 여성이다. 그러나 외교부의 고위공직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여성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은 지난 60여 년 동안 총 850여명의 외교관을 대사나 영사로 파견했다. 그 중 여성은 40명으로 전체의 4.7%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그 비율이 높아져 총 160명의 중국대사 중 약 20명이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12.5%가 여성대사인 것.
지난해 양제츠 외교부장은 “중국외교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고 강조하며 “중국이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경쟁력, 친화력, 도덕적 명분 등 국가경쟁력을 갖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외교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제츠 부장이 제시한 이런 외교관의 덕목이 중국외교부 인사정책에 반영돼 푸잉과 같은 친화력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여성외교관들이 이전 보다 많이 대사나 영사 등 고위직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고 중국언론은 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외교가에 여성 외교관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되는 푸잉은 어떤 인물일까.
◆중국 여성외교관의 선봉, 푸잉 외교부 부부장
2010년 1월 중국정부는 36년 만에 여성을 외교부 부부장에 유럽지역 담당 부부장인 푸잉(傅瑩, 58)을 임명했다.
중국역사상 두 번째 여성 외교부 부부장이지만 1978년 개혁개방 이후로는 첫 번째 부부장인 셈.
물론 푸잉에 앞서 문화혁명 기간에 왕하이롱(王海容)라는 여성이 외교부부 부부장으로 임명된 적이 있다.
그러나 왕하이롱은 마오쩌둥과 인척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중국 내외 전문가들은 푸잉을 진정한 중국외교부 최초 여성 부부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내가 존중 받는 것은 바로 세계가 중국의 강대국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중국은 국제무대의 변방에서 이미 중심 위치로 진입했다고 여기고 있다.”
2009년 4월 영국잡지 ‘디플로매트(Diplomat)’에 ‘2009년 아시아외교관상‘을 받은 푸잉이 한 수상소감이다.
당시 잡지는 수상 이유로 “푸잉의 솔직함과 다정한 방식으로 중국이 협력을 통해 평화로운 발전을 하길 원한다”며 “푸잉이 국제사회가 직면한 공동 도전에 대응하는데 있어 중국이 더 큰 역할로 조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길 원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잘 보여줬다”고 밝혔다.
푸잉은 이후 중국외교부 아주국 국장을 거쳐 호주, 영국 대사로 활동했다
중국 외교역사상 호주와 영국과 같이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국가의 대사를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49년 이후 2003년까지 중국내에는 37명의 여성 대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 등 에서 근무했다.
푸잉은 외교부 번역실에서 외교 업무를 시작해 덩샤오핑(鄧小平), 양상쿤(楊尙昆),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등 중국최고지도자의 개인통역이 맡으면서 중요 업무를 접하게 된다.
푸잉이 아주국 국장 근무 시절 동티모르 사태 비롯해 아프간 전쟁,한반도 핵문제에 이어 6자회담 등 굵직하고 중요한 외교 사안이 있었으나 이를 잘 돌파해 나갔다.
특히 6자회담을 아주국 국장으로서 두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준비했다. 현 중국외교부 대변인인 장위가 강경한 어투나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한다면 푸잉은 조용하고도 온화한 외교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2008년3월 티베트 독립 유혈 사태시 서방 언론들이 티베트 시위대의 정당성을 보도하자 당시 영국 대사였던 푸잉은 영국 정재계와 학계, 언론사 등을 쫒아 다니며 중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이를 본 해외언론들이 그의 외교능력을 평가해 ‘위기대사(危機大使)’라 별칭 했다. 몽골 출인인 푸잉은 당차고 용감해 어려운 외교문제를 해결해왔다는 의미에서 ‘초원의 여걸(草原女傑)’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아주경제 & EAI 중국연구센터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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