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세계 경제 위축의 위기는 ‘오일머니’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한국 경제에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70년대 석유값이 폭등하면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아랍 산유국들은 왕궁, 병원, 학교, 무료 아파트, 고속도로 등 대대적인 건설·토목공사에 나선다.
인건비도 싸고 솜씨도 좋았던 한국 건설회사가 대거 중동으로 몰리면서 이른바 ‘중동특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안전보다는 공사기간이 우선이었던 회사 방침과 혹독한 자연환경을 극복해가면서 벌어들인 달러는 오일쇼크로 허덕이던 한국경제를 떠받쳤다. 베트남 파병과 중동 건설붐은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토대이자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한국업체의 중동 러시는 진출한 지 불과 4~5년만에 중동시장을 석권하게 됐고,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중동지역 경제개발의 기본적인 제약은 개발자원이 아니라 오히려 인력의 부족이었다는 점을 간파한 우리 정부는 유가급등에 대처하고 양질의 건설기능인력을 확보하면서 경제협력을 밀착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당시 한국의 임금수준은 일본의 25%, 스웨덴과 같은 서구수준의 10%에 지나지 않았다. 건설공사의 치열한 수주경쟁에서 월평균 420달러에 불과했던 한국근로자의 저임금이 커다란 비교우위로 작용했다. 이같은 낮은 임금은 한국 업체들에게 10% 정도의 저가입찰을 가능하게 하면서 건설기능공으로서의 진출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해외 건설은 무역외수지를 크게 개선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건설수지의 대폭적인 흑자는 1976년까지 고질적인 무역외 수지의 적자를 흑자로 반전시켰다.
1976~78년까지 해외건설의 GNP(국민총생산)성장기여도를 보면 10.6%, 79년에는 7.5%, 1980년에는 무려 40%에 가까운 것이었다. 1980년도에는 GNP는 5.6%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음에도 해외건설이 버팀목이 된 셈이다.
반면 부작용도 있었다. 막대한 외화유입으로 비롯된 외환인플레이션과 국내외 건설임금 균형이 국내 임금의 상승을 촉발시켰고, 국내 건설인력의 부족과 같은 일시적인 수급마찰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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