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8년 5월 대만에 마잉주(馬英九) 내각이 들어서자 중국 역시 바빠졌다. 중국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던 마잉주 총리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냉각됐던 양안관계에 변화를 꾀할 모멘텀이 생긴 것. 이에 중국 역시 분위기쇄신 차원에서 대만문제를 총괄하는 공산당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을 거물급 인사로 교체할 인사수요가 발생했다. 대만사무판공실은 중국 공산당 중앙에도 소속돼 있고, 국무원에도 소속돼 있다. 대만문제는 당과의 소통은 물론 국무원과의 소통 역시 중요한 중국외교의 우선순위에 위치해 있다.
2008년 6월 새로 임명된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은 당시 외교부 상무부부장이던 왕이(王毅). 당시 왕이는 외교부 내 ‘넘버2’였으며 차기 외교부장으로 꼽히던 거물이었다. 중일관계 개선에 큰 공을 세운 바 있던 왕이로서는 또 한번의 공을 세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며, 그는 공산당 중앙의 기대에 부응해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업적이 뚜렷한 만큼 그는 차기 외교부장이나 외교담당 국무위원이나 부총리에 기용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중국이 G2에 올라선 위상을 대변해 외교수장이 정치국위원급으로 격상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현재 중국외교의 수장은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으로 공산당내 중앙위원에 그쳐 있다. 왕이의 최대업적은 단연 대만관계 개선이다.
◆양안관계 급물살의 주역
양안 회담의 역사는 국민당 정부의 대만 철수 이후 42년만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과 대만은 중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노선에 의해 각각 반관영 접촉창구인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를 설립하고 두 기구로 하여금 양안접촉을 하게끔 했다. 하지만 1995년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의 미국방문에 대한 중국의 반발에 이어 1999년 리덩후이가 제창한 ‘양국론’에 의해 대화는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양안관계의 전환점은 단연 2008년이었으며, 왕이가 대만사무판공실로 부임하던 그해 6월 천윈린(陳云林) 해협회 회장과 장빙쿤(江丙坤) 해기회 이사장이 베이징에서 제1차 양안회담을 열었다. 양측은 주말 직항 항공노선을 개설하고 중국 단체관광객의 대만 관광 개방에 합의했다. 이후 양안회담은 숨가쁘게 진행된다.
양측은 제2차 양안회담을 그해 11월 대만 타이베이에서 개최하고는, 양안 직항노선 매일운항, 항구개방, 전면적인 우편교류 등 이른바 ‘대삼통(大三通:통상,통항,통신) 시대를 열었다. 이듬해인 2009년 4월 양측은 난징(南京)에서 제3차 회담을 갖고 항공 직항편 증편과 투자 및 금융협력 강화 등에 합의했고, 그해 12월 대만 타이중(臺中)시에서 제4차 회담을 열어 양안간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차기 회담의 공식 의제로 확정했다.
◆중화경제통합체 첫단추 ECFA
2010년 1월부터 ECFA에 대한 공식 협상이 시작됐으며 양측은 수차례 중국과 대만을 오가며 실무협상을 거친 끝에 지난해 6월29일 ECFA가 공식체결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ECFA는 자유무역협정(FTA)과 비슷한 효력을 지니며 이로써 양국의 경제적 통합은 가속페달을 밟게 됐다. 양측은 2012년까지 관세 폐지에 이르는 이른바 조기수확 대상품목에 대만이 539개 품목을, 중국이 267개 품목을 포함시켰다. 양안간 ECFA는 그해 9월에 정식 발효됐다.
중국측 협상대표는 해협회였지만 정책제시나 방향설정, 실무총괄 등은 대만사무판공실의 몫이었다. 왕이 주임은 당시 “ECFA는 대만 기업들에게 대륙에서의 경영 과정에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 “대만사무판공실을 비롯한 중국의 유관 부처들은 대만 기업이 내수시장을 개척하고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왕이 주임은 이에 더 나아가 통일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왕 주임은 지난 1월18일 구이린(桂林)에서 열린 제9차 양안관계연구회에 참석해 “중국의 명확하면서 일관된 입장은 양안(兩岸)의 평화통일”이라고 발언했다. 그는 “평화통일은 장기적으로 볼 때 양안 동포의 이익과 중화민족의 근본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고 부언했다.
그러면서 “평화통일은 대륙이 대만을, 대만이 대륙을 병탄하는 것도 아니며 양안이 중단됨없이 교류와 협력, 평등한 협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양안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대만통일 주장은 대만인에게 상당히 자극적일 수도 있는 발언이다. 하지만 왕이는 통합경제권을 만들어 놓은 후 ‘통일은 대세’라는 전제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25세에 외국어대 늦깍이 입학
1953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왕이는 1969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에 휘말려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하방된다. 그는 이 곳에서 7년5개월간이나 농촌생활을 하게 되며 문혁이 끝난 후인 1977년 2월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왕이는 그 해 12월 문혁 이후 10년 만에 치러진 대학입학시험에서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 당시 만 25세로 학과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신중했으며 말수가 적었다고 전해진다. 논리적이고 주관이 뚜렷해 자신만의 의견이 분명했던 학생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2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간 뒤 그는 승진가도를 달렸다. 외교부에 들어갈 때는 만 29세의 늦깎이였지만, 5년 만에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亞洲司) 처장에 올라 그보다 10여 년 전 외교부에 들어간 선배들을 앞질렀다. 1994년 3월에는 아주사 부사장에 올랐다. 그해 7월 김일성 사망을 겪으면서 한반도 문제에 깊숙히 관여하게 된다.
◆김일성 사망 당시 아주사 근무
특히 왕이는 1994년 11월 외교부 아주사 부사장으로서 베이징 주재 한국특파원들과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중국의 한반도정책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밝힌바 있다. 그가 당시 소개한 중국의 대한반도정책은 아직까지도 중국을 이해하는데 비교적 유용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중국은 사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북한 스스로가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는 데다 북한사람들은 자존심이 무척 높아 중국에 대해 자기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법이 드물다”며 “그러나 중국과 북한은 오랜 동맹국가로서 많은 인적, 물적 교류를 해오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북한정세를 판단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김정일에 대한 북한의 신격화현상은 중국이 문화대혁명 당시 한 개인에 대해 취했던 숭배현상을 초월한 것”으로 “이는 북한인민이 김정일을 지도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경지면적이 적은 북한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식량을 수입해야 한다.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하며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공업발전을 위해서는 또 에너지가 필요하다. 중국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게 이전에 합의된 대로 원조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자신이 에너지 부족상태에 놓여 있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라며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기도 했었다.
왕이는 이어 1995년 6월 아주사 사장(司長), 98년 4월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에 이어 2001년 만 48세 나이에 외교부 최연소 부부장(서열 3위)이 됐다.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로서 북한 핵을 푸는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4년 9월 그는 주일대사로 부임해간다.
◆일본에서의 대활약
왕 주임은 ‘일본통’이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을 뿐 아니라 주일 대사 3년을 포함해 7년6개월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그는 네이티브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하며,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일본 총리와는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내며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 부부와도 교분이 깊다.
2004년 당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중일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양국관계는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치치하얼(齊齊哈爾) 화학무기 방치사건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가 주일 대사로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은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중국을 자극했고, 2005년 5월 고이즈미 전 총리가 “올해 안에 또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발언하자 방일 중이던 우이(吳儀) 부총리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터졌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와세다대 등 여러 민간기관을 돌면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양국의 공동협력이 중요하다는 중국의 기본정책을 전파했다. 이후 2006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4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고, 2008년 5월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일본을 답방해 양국관계를 화해무드를 조성했다. 이 같은 공은 고스란히 왕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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