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송정훈 기자) ‘가난한 고학생’‘모래시계 검사’‘저격수’등 다양한 별칭이 따라다니는 홍준표 한나라당 신임대표. 그는 검사때도, 국회의원때도‘변방’에 머무르는 비주류였다. 그러나 7·4 전당대회에서 집권여당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비정규직’아버지를 둔 사람도 여당을 대표를 맡을 수 있다며 희망을 외쳤던 홍 대표. 그의 혹독한 인생 속으로 들어가봤다.
홍준표 한나라당 신임대표의 15년 정치인생에는 많은 인물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여야 첫 수평적 정권교체, 노무현 대통령 탄핵 등 정국의 소용돌이 중심에 홍 대표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1월26일 홍 대표는 민주자유당(한나라당 전신)에 입당했다. 전날 밤 11시 이철, 유인태, 제정구, 노무현, 김홍신 등 꼬마 민주당 전.현직 의원 9명이 홍 대표 집으로 찾아와 민자당 행을 막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30분간 홍 대표에게 훈계한 뒤 집을 떠났고 제정구 의원 등은 새벽 2시반까지 설득하고 질책하기도 했다.
홍 대표는 “원래 민주당 이기택 의원에게 강남을 공천을 원했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그러던 중 김영삼 대통령 측으로부터 입장 제의를 받고 그렇게 하기로 해 마음이 흔들렸지만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12년간 여당이 이겨보지 못한 지역구 송파갑에서 압승하고 국회에 입성한 홍 대표는 ‘민중당 트리오인’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의원 등과 시월회를 조직해 정치활동을 해나갔다.
홍 대표는 1997년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후보의 법률특보를 맡으면서 그와 인연을 쌓는다. 그는 이 후보의 아들 병역문제가 불거지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도 국민 정서가 악화될 수 있다. 대국민 사과를 하고 두 아들 중 한명을 자원봉사자로 소록도로 보내자”고 직언하기도 했다.
홍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의 관계도 각별했다. 1999년 선거법 위반 문제가 불거지면서 의원직을 사퇴한 야인시절 홍 대표는 미국 워싱턴으로 무작정 떠났다. 워싱턴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객원 연구원 자리를 얻어 놓고서다. 미국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홍 대표 눈앞에 이 대통령이 서있었다. 그도 3개월여 전 선거법 위반 재판 도중 의원직을 사퇴하고 조지워싱턴대 객원교수로 와 있었다. 손 대표도 경기지사 선거에서 실패하고 워싱턴에 있었다.
이 대통령, 손 대표와 교분을 두텁게 가지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홍 대표는 “이회창 이후 한나라당의 지도자라는 경쟁의식이 있었는지 3명이 같이 만나는 것을 서로 회피했다”며 “이 대통령과는 시간이 나면 주로 골프를 했고, 골프를 못하는 손 대표와는 세상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고 회고했다.
박근혜 전 대표와는 2005년 한나라당 혁신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관계를 맺었다. 박 전 대표는 당시 두번이나 홍 대표를 찾아 혁신위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홍 대표는 “최고위원을 포함한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도입, 공직후보 선출시 여론조사 규정 도입 등 당혁신안의 골격을 처음 만들었던 시기”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