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아트센터의 공익성과 상업성

[박성택 예술의 전당 사무처장]

최근 들어 아트센터를 운영하는 데 있어 공익성과 상업성 중 어느 부분에 치중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논란이 일어나곤 한다. 혹자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경영평가가 정성적인 부분을 고려치 않고 너무 정량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공익성은 뒤로한 채 수익성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비판을 제기하곤 한다.

하지만 정부가 추구하는 평가목적은 과거 공공기관이 걸어온 방만한 경영방식을 변화시키고 보다 효율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해 일각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다. 이러한 정책은 많은 공공기관에게 분골쇄신하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많은 변화를 불러와 공기업들이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와중에 공익성과 수익성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선진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명약관화한 것이다. 즉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하는 입장에서는 평가 자체를 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평가방식에 대처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돼 그 데이터들이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통계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를 주도하려면 가급적 정성적인 평가기준을 정량화할 수 있는 기술을 배양하고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또한 자신들이 모든 정열을 바쳐 이룩한 실적에 자신감을 갖고 평가 그룹을 설득하는 열정은 공기업으로서는 당연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러한 사례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포진돼 있는 공기업들에게 당연히 적용되겠지만, 장르의 특성상 정성적인 평가에 익숙해져 정량적인 평가가 어려운 문화예술분야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감동, 상쾌, 즐거움, 불쾌, 짜증 등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을 어떻게 수치로 환산하느냐라는 반문은 당연하다.

이러한 주장이 대립될 때마다 한 가닥 외줄 위에 서있는 느낌을 받는다. 정성적인 평가기준이 예술을 주제로 한 공기업의 공익성 추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과 수익성을 외면한 채 정량적인 면만을 중시하는 시각이 예술계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의 문화예술 향유기회의 증폭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견이 대립돼 팽팽하게 허공을 가로지르는 외줄 말이다.

하지만 성숙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면 이러한 긴장감은 슬기롭게 완화되리라 생각한다. 결국 공익성과 수익성이라는 양측의 힘이 서로 대립하는 것보다는 조화롭게 공존한다면 대립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긴장감이 아니라 혜택이 돼 국민의 문화복지를 강화하는데 필요한 기운으로 자연스럽게 환원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링컨아트센터의 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링컨센터는 1960년대 지어진 링컨센터의 시설과 주변을 예술의 거리로 만들겠다는 리노베이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최초 링컨센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문화조류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미국 문화예술의 근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오던 곳이다. 이러한 링컨센터가 미국 문화예술의 상징적 랜드마크로 조성되기까지에는 수많은 후원자들의 역할이 컸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에버리피셔홀의 일화부터 앨리스튤리홀의 리노베이션과 링컨센터의 게이트웨이 역할을 하던 하모니아트리윰을 David Rubenstein Atrium으로 리노베이션한 사례까지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각계각층의 후원이 모여져 오늘날 링컨센터의 근간을 마련했다. 특히 David Rubenstein Atrium은 인류학자이며 자산가로 링컨센터의 바이스체어맨인 David Rubenstein이 1천만 달러를 기부해 재 조성된 장소로 공사가 끝난 후 공공장소로 개방되자 난 후 첫 6개월 동안 약150000명이나 다녀갔다.

또한 ‘브라보 링컨센터’라는 캠페인에는 시티그룹, JP모건, 모건스탠리, 월트디즈니 등 국제적인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부터 후원을 유치, 12억 달러의 재개발 계획에 투자해 2010년 기준으로 모든 계획의 90%가 완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서 링컨센터는 세계의 문화예술을 주도할 새로운 랜드마크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세계예술경향을 주도할 새로운 예술조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의 주목과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다.

경제적인 파급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12개의 문화예술단체로 구성돼 있는 링컨센터에는 2011년 기준 총 9000명의 풀타임, 파트타임, 일용직근로자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매년 5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미국 동부의 문화, 관광 등을 아우르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수천 명의 예술가가 26개의 실내외공연시설에서 활동하고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와 교육들이 함께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5000개 이상의 이벤트, 투어,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어 주변 및 뉴욕시 전체에 미치는 경제적인 효과 또한 엄청나며 간접적인 효과까지 고려한다면 그들이 수년 전 단행한 계획은 문화예술산업이라는 분야의 교과서적 가치를 지닐 것은 매우 당연한 예측이다.

이에 뉴욕시도 링컨센터에 2억5000만 달러 규모의 지원을 계획하고 있어 이 프로젝트는 민간과 정부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됐다. 이것이 가능했었던 이유는 미국 사회가 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이익과 파급효과를 이미 자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트센터가 생활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밤 시간대에 공연관람이라는 단순함만 제공하는 기능 외에도 낮 시간대에도 공연·전시를 비롯해 교육, 공공서비스, 컨퍼런스, 이벤트, 쇼핑, 식사 등 다양한 기능들이 한데 모여져 새로운 생활공간으로서의 충분한 가치가 확인되었기에 기업을 비롯한 투자자의 마음이 움직였다.

즉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기업은 대개 국제적으로 성공한 기업으로 자사의 근간이 소비자라는 것과 소비자는 기업이 속한 사회의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기업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구성원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소비자는 이러한 자각을 통해 성공한 기업을 선택한다.

이러한 원숙함에서 기인되는 선순환 구조가 주는 교훈은 공익성과 상업성을 어느 부분에 적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준다. 즉 아트센터가 상업적인 활동을 통해 민간 재원을 끌어들여 운영 재원을 마련하고 시설을 재정비하는데 투자하는 것을 상업성이라고 판단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 상업성을 통해 축적한 재원을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활용한다면 그 결론은 무척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영정책은 부유한 사람에게 서민층보다 더 많은 세금과 사회적 책임을 부과하는 민주주의 원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보는데, 부는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은 18세기 시민혁명 이후부터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민주적인 매체라는 상징성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계층에 분배돼야 한다. 예산도 정부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같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조성돼야 함이 마땅하다. 이제 공익성의 반대개념은 상업성이 아니며, 공익성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요소로 인식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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