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금융 안정과 금융 신뢰의 종결자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취임사)
김석동 금융위원장과 권혁세 금감원장이 각각 취임 6개월과 100일을 맞았다.
그러나 이들의 취임 일성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해결사’를 자처하던 김 위원장은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하면서 조기 레임덕을 우려해야 할 처지가 됐다.
금융시장의 종결자가 되겠다던 김 원장도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금융당국 수장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우리금융지주 민영화와 저축은행 구조조정, 가계부채 연착륙 등 산적한 현안들이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권위와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뚜렷한 묘책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 ‘해결사’에서 ‘김석동 신드롬’ 주인공으로
최근 금융시장에는 ‘김석동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회자되고 있다. 당초 원대한 구상을 제시하며 벌인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지난 1월 김 위원장이 취임할 당시만 해도 업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취임 직후 삼화저축은행 등 부실 저축은행 정리 작업에 나서면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삼화저축은행에 대한 영업정지를 발표하면서 “당분간 추가적으로 영업정지를 당할 저축은행은 없다”고 공언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이후 부산저축은행 등 7개 저축은행이 무더기로 영업정지를 당하면서 김 위원장에 대한 신뢰도는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장의 불안감이 예금 대량 인출 사태(뱅크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탓이다.
김 위원장의 설화(舌禍)는 계속됐다.
하나금융지주가 외환은행 인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논란이 불거지자 김 위원장은 “도망가면서 처리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지만 아직도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론스타에 대한 수시 적격성 심사 결과도 4월에서 5월로, 5월에서 6월로 연기되더니 결국 법원의 판결 이후에나 입장을 밝히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론스타는 최근 5000억원에 가까운 중간배당을 실시해 '먹튀' 논란을 다시 일으키며 금융당국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금융 매각 과정에서 나타난 금융당국의 무력함은 김 위원장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금융지주회사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추진했던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 개정은 정치권의 반대로 무산됐다. 게다가 과당 경쟁을 우려할 정도라는 김 위원장의 장담과 달리 인수참가의향서(LOI) 접수 결과 국내 사모펀드(PEF) 3곳만 입찰에 참여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 임기가 1년 반이나 남았고 김 위원장도 취임한 지 고작 6개월이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금융위원장 교체론이 언급될 정도로 시장의 반응은 냉담해졌다.
◆ 저축은행 비리 사태에 ‘손발’ 묶인 권혁세
지난 3월 금감원의 새 수장으로 임명된 권 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고난의 행군을 펼쳐야 했다.
저축은행의 경영 부실을 눈감아준 대가로 금품을 받은 임직원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금융검찰’로 불리던 금감원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한 금감원을 떠맡게 된 김 원장은 국회 등을 전전하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국무총리실에서 운영 중인 금융감독혁신 태스크포스(TF)에 조직의 장래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조직 쇄신을 위해 사상최대 규모의 인사를 단행한 탓에 업무 파악 능력이 저하되면서 금융시장에 대한 효과적인 감독·검사 기능을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권 원장 스스로 “취임 후 100일이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고 고백할 만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은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금감원의 감독과 검사 기능 분리, 금융소비자보호원 신설 등 금감원 자체가 흔들릴 변수들이 남아있는 만큼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 금융당국 통제력 상실, 업계 ‘항명’ 이어져
금융권에 대한 당국의 통제력이 현저히 저하되면서 추진하는 현안마다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내 금융지주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현 정권의 실력자들로 채워지면서 금융당국의 요청이 번번히 거절당하고 있다.
우리금융 민영화의 경우 금융당국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국내 금융지주회사들은 한 곳도 입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과거처럼 에둘러 표현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불참 의사를 밝혔다. 금융당국의 압박보다 기업가치 훼손을 경계하는 주주들의 의견이 더욱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부실 저축은행 매각 작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중앙부산·부산2·도민저축은행’ 패키지 입찰은 금융지주회사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대신증권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나머지 4개 저축은행도 매각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가계부채 종합대책과 저축은행 경영정상화 추진방안 등 굵직한 정책에 대해서도 업계의 불만이 높다.
카드사들은 금융당국이 자금조달까지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반발하고 있고, 저축은행들은 수익원 확충을 위한 지원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비거치식·고정금리 대출 비중을 확대하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에 대해 “이자가 비싼 고정금리로 갈아탈 대출자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코웃음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권의 한 고위 인사는 “지금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 금융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지 여부가 판가름날 중요한 시기”라며 “금융당국 수장들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시장도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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