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사망설] 저물어 가던 상하이방에 '청천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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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7-0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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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장쩌민(江澤民) 사망설이 불거졌지만 공식확인되지 않는 가운데 장쩌민의 건강이 악화된 것만은 확실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쩌민의 건강악화는 1990년대부터 중국을 주름잡아 오던 상하이방의 쇠퇴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관측된다. 또한 상하이방의 쇠락은 내년 10월에 예정된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 중국 정치권의 지각변동도 예상된다.

◆상하이방 최정점 장쩌민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1989년부터 2005년 9월 군사위 주석직에서 물러나기까지 16년 동안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다. 1926년생 장수(江蘇)성 양저우(楊州)에서 출생한 장쩌민은 194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1985년 상하이 시장에 선출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년후인 1987년 상하이 서기에 올랐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태 당시 상하이의 대학생들의 시위를 공산당 중앙의 정책에 맞춰 효과적으로 진입한 공을 바탕으로 그는 덩샤오핑(鄧小平)과 리펑(李鵬), 보이보(薄一波), 양상쿤(楊尙昆) 등 원로들의 낙점을 받아 그해 6월 권력서열1위인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됐다.

이후 11월에는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맡았고 이듬해 4월 국가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랐으며 1993년 3월 국가주석까지 맡으면서 그는 당(黨)·정(政)·군(軍)의 권력을 움켜쥐었다.

당시 톈안먼사태 수습용 카드일 뿐이며 정계에서 단명할 것으로 여겨졌던 장 전 주석은 1993년 자신의 대항세력이었던 양상쿤과의 정치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후 그는 중국의 실질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2002년 제16대 전국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현 국가주석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넘겨주고, 이듬해 3월에 국가주석직도 승계시켰다. 군사위원회 주석직은 2005년에 후 주석에게 물려주면서 정치 1선에서 완전히 후퇴한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도 고위관료들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등 후주석에 버금가는 강한 정치력을 유지해 왔다. 퇴임후에도,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그의 정치력은 권력 요직 곳곳에 포진해 있는 상하이방에 기인한다는 평가다.

◆장의 권력기반, 상하이방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근무하기 전에는 국무원에서 일해 왔다. 국무원에서의 가장 마지막 직책은 전자공업부장이었다. 그는 군에서, 그리고 공산당 중앙에서 일을 한 경험이 없으며 이로 인해 그가 1989년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돼 베이징에 입성했을 때 그를 받쳐줄 인맥이 부족했다. 때문에 그는 상하이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일한 동료들을 하나씩 중앙에 불러들여 요직을 맡겼다. 또한 과거 자신과 신뢰관계를 쌓아온 인물들도 중용했다.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이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상하이방'이란 정치집단을 형성했다.

주룽지(朱鎔基) 전 상하이 서기가 국무원 총리로 발탁됐으며, 황쥐(黃菊) 전 상하이서기도 국무원 부총리로 등용됐다. 역시 상하이서기를 역임했던 우방궈(吳邦國)는 현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이며, 상하이시 부서기를 지낸 쩡칭훙(曾慶紅)은 국가부주석까지 올랐다. 1997년 낙마한 천량위(陣良宇) 상하이시 서기도 상하이방의 대표주자였다.

이 밖에 장쩌민이 기계공업부에서 근무하던 시설 맺은 인연들도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대표적으로 자칭린(賈慶林) 정치협상회의 주석, 리창춘(李長春) 중앙정신문명지도위원회 주임 겸 정치국상무위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상하이방의 막후실세였던 쩡칭훙의 인맥 역시 상하이방에 포함된다. 석유계통에서 잔뼈가 굵은 쩡칭훙은 석유방으로 불리는 동종업계 출신 인사들을 요직에 중용했다.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위 서기와 저우융캉(周永康) 중앙정법위 서기, 장가오리(張高麗) 톈진(天津)시 서기가 이에 속한다.

주룽지 전 총리의 인맥인 왕치산(王崎山) 부총리와 황쥐 전 부총리의 인맥인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도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또한 장더장(張德江) 부총리도 장쩌민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공청단파에 밀리며 세력 약화

2002년 후진타오 주석이 서열1위에 올랐을 때도 실권은 상하이방이 갖고 있었다. 당시 9인의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총리를 제외한 우방궈, 자칭린, 쩡칭훙, 황쥐, 우관정(吳官正), 리창춘, 뤄간(羅幹) 등 7명이 상하이방 소속이었다. 게다가 장쩌민은 후주석의 비서실장격인 중앙판공청 주임에 자신의 측근인 왕강(王剛) 정치국 위원을 임명했고, 또한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에 허궈창을 앉혀 후주석을 자신의 영향권하에 두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장쩌민이 현직을 떠난 만큼 정치적 영향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그동안 양성해 둔 상하이방 멤버들도 하나둘 나이가 들어 퇴직하면서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후진타오 주석이 공청단 재직시절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대거 지방정부 지도자나 중앙의 실무자로 앉히면서 '공청단파'라는 정파를 형성하면서 상하이방의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2007년 제17대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상하이방의 영향력은 표면상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선임된 9명의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리커창 (李克强) 부총리를 제외한 6명이 범상하이방 멤버였다. 하지만 상하이방은 상무 부총리, 정협 부주석, 중앙판공청 주임, 중앙조직부장, 중앙기율위원회 상무 부서기, 정법위 상무 부서기 등 요직을 공청단파에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청단파는 후진타오주석이 대거 양성해놓은 만큼 인재풀이 넓다. 또한 리커창 부총리, 리위안차오(李源祚) 중앙조직부장, 왕양(王洋) 광둥성 서기 등 상당한 정치력을 지닌 인사들이 공청단파를 떠받치고 있다. 제18대 전국대표대회나 제19대 전국대표대회가 다가오면 공청단파가 중국을 장악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은 이때문이다.

◆18차 상무위원, 지각변동오나

이같은 배경하에 상하이방은 장쩌민이라는 구심점마저 잃게 된다면 그 세력이 급속히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축소된 세력은 공청단파가 메울 것이 유력시된다. 특히 내년 있을 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구성될 상무위원회의 면모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

차기 상무위원 후보로 시진핑 부주석과 리커창 부총리는 거의 확정적인 단계에 있다. 이에 더해 연령제한에 걸리지 않는 현재 정치국위원이 우선적인 상무위원 후보로 꼽힌다.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 7자리를 두고 왕치산 부총리,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류윈산(劉雲山) 선전부장,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장, 왕양 광둥성 서기, 장가오리 톈진시 서기, 장더장 부총리,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서기 등 9명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이 중 시진핑과 왕치산, 위정성, 보시라이 등 4인은 범상하이방이면서도 국가원로들의 자제들의 정파인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장더장, 류윈산, 장가오리는 장쩌민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상하이방 멤버들이다. 리커창, 류옌둥, 리위안차오, 왕양은 공청단파로 분류된다.

장쩌민의 사망설로 인해 우선 더 많은 공청단파가 상무위원에 진입하고 상하이방 멤버들의 낙마가 점쳐진다. 하지만 아직은 중국정치의 변수가 많기 때문에 이같은 예상은 섣부르다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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