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34>쑹슈옌 – 온화한 소통능력 갖춘 박사출신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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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7-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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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10년 1월11일 당시 칭하이(靑海)성 성장이던 쑹슈옌(宋秀岩)은 “중국공산당 중앙의 인사조정으로 인해 칭하이성 성장직을 사직하고자 한다”며 칭하이성 인민대표대회에 성장직 사직서를 제출했고, 인민대표회의는 일사천리로 뤄후이닝(駱惠寧)을 부성장 겸 대리성장으로 임명했다. 이 내용은 언론을 통해 즉각 전파됐으며 중국인들의 관심사는 상당한 대중적 지명도를 지니고 있던 쑹슈옌의 다음 관직이 어디인가에 쏠렸다.

다음날인 1월12일 전국부녀연합회 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쑹슈옌을 전국부녀연합 부주석에 임명했다. 곧바로 열린 전국부녀연합 상무위원회의는 쑹슈옌을 서기처 제1서기에 임명했다. 쑹슈옌의 앞날을 밝게 보던 많은 중국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국부녀연합회의 부주석이라는 직책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분석가들은 쑹슈옌의 관료인생이 이미 정점을 찍었고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반면 일부 인사들은 쑹슈옌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고 말한다. 쑹슈옌은 공청단파의 중요한 인물로 후진타오 주석의 상당한 신뢰를 얻고 있다. 그동안 중앙에서의 공직경험이 없었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혀온 만큼 전국부녀연합회를 통해 더 높은 직위를 꿈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쑹수옌은 쑨춘란(孫春蘭) 푸젠(福建)성 서기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쑨춘란은 전국부녀연합회와 비슷한 성격인 전국총공회연합회의 제1서기에서 2009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영전해 갔다. 쑨춘란 역시 촉망받는 여성정치인이었으며 중앙정치경험이 없었다. 2005년부터 4년간 중앙에서 근무한 후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저장성 서기로 이동해 갔다.

일부에서는 공청단파 핵심인물 중 한명인 쑹슈옌이 중앙에서 공산당 핵심과 충분한 네트워크를 쌓은 후 내년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 고속승진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다. 이 같은 분석은 물론 쑹슈옌이 후진타오 주석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점에 기반하고 있다.

◆전국부녀연합회에 실세정치인

쑹수옌이 현재 몸담고 있는 전국부녀연합회는 중국공산당의 하부조직으로 전국 각 민족 각 계급 여성들을 대표하는 단체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여성대중들과 연계하는 공식적인 창구로 국가정권의 중요한 사회기둥의 하나다. 1949년 3월에 설립됐으며, 기본직능은 광범한 여성들을 단합, 동원해 경제건설과 사회발전에 참여하고 여성이익을 대표, 수호하고 남녀 평등을 추진하는 것이다.

전국부녀연합회의 실권은 제1서기에게 있으며 형식적 1인자인 주석직은 명예직에 가깝다. 주로 덕이 높고 명망있는 여성원로가 배치된다. 현재 전국부녀연합회의 주석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직계인 전 국무위원 천즈리(陳至立, 68세)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이다. 그동안 샹차이창(像蔡暢)、캉커칭(康克清)、천무화(陳慕華)、펑페이윈(彭珮雲)、구슈롄(顧秀蓮) 등이 주석을 거쳐갔다.

촉망받는 정치인인 쑹슈옌이 전국부녀연합회의 제1서기로 오자 조직에는 활기가 돌았다. 그동안 구상만 하던 사업들이 하나둘 추진력있게 실행되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전국부녀연합회는 ‘여성인재개발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여성 인재는 수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분포, 수준, 유형, 성별비례가 사회발전과 국제수준에 비춰 미흡하다는 인식하에 제도, 정책, 자원 및 여론 등 각 방면에서 여성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국가 인재개발 예측과 평가지표에 성별 통계를 삽입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의견서에는 광범위한 통계자료가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세포조직과 같은 부녀연합회의 조직망은 중국 전역에 퍼져 있으며 이들이 중앙에 보고한 여성인재 현황이 근거로 제시됐다. 또한 각 성별 시별 여성의 주요직책 진출비율을 비교평가해 여론에 공개하기도 했다.

2010년 11월 쑹슈옌은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중국부녀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해 양국 여성간의 교류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이 “최근 열린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 동지가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은 조선 혁명 발전에서 매우 깊은 의의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는 김정은 후계설을 두번째로 공식 확인한 자리였다. 후진타오 주석의 신뢰가 깊으며, 앞으로 전도가 유망한 여성 정치인이 방북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정은 후계설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한 것이다.

◆2005년 홍일점 지방 지도자

쑹슈옌이 중국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 것은 단연 2005년의 인사조치에서 비롯된다. 그해 1월 22일 중국 칭하이(靑海)성 인민대표대회가 쑹슈옌 칭하이 부서기를 성장에 선출하자 중국의 언론들은 중국에서 22년만에 홍일점 성장이 출현했다고 환호했다.

당시 쑹 성장은 전국 31개 성ㆍ시ㆍ자치구중 유일한 여성 성장이 됐다. 역대로보면 지난 1983년 장쑤(江蘇)성 성장에 당선됐던 구슈롄(顧秀蓮)에 이은 두번째 여성 성장이었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사였다. 이후 2009년 12월 쑨춘란 전 전국총공회 서기처 제1서기가 푸젠성의 서기로 오면서 성장과 당 서기를 포함한 지방 제후 가운데 유일한 홍일점 자리는 5세 많은 쑨 서기에게 돌아갔다. 



◆어린시절부터 리더십 돋보여

조적(祖籍)이 톈진(天津)인 쑹슈옌은 1955년 10월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에서 출생했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시 철로국 랴오양(遼陽) 분국의 역장조리를 하던 부친이 칭하이성의 란저우(蘭州) 철도국 시닝(西寧) 분국에 소속된 한 역의 역장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닝 철로1중으로 옮긴다.

중학교시절부터 쑹슈옌은 훌륭한 리더십을 보였다. 당시 시닝철로1중학교의 수학교사는 “쑹슈옌은 같은학년 6개학급 중 유일한 여자 반장으로서 달변이며 글도 잘썼다”고 회고한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던 당시 학교는 수시로 학생근로자, 학생농민, 학생군인 등을 조직했다.

쑹슈옌은 매사 열심이었으며 하루 일과가 끝나면 급우 50여명이 모두 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까지 확인한 후에 하교했다. 당시는 폭력사태가 빈번이 일어날 때였으며 쑹슈옌은 자신의 급우들이 한명이라도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친구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청단 서기로 6년간 재직

1971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닝철로분국 신호통신구 업무보고원으로 배치됐다. 업무보고원이 되기위해서는 검증의 검증을 거쳐야 했다. 학교에서 마오쩌둥(毛澤東)어록을 가장 빨리 외울 수 있었던 쑹슈옌은 훌륭한 성적으로 업무보고원에 배치됐다. 게다가 그는 6명의 보고원 가운데 업무 성적이 가장 뛰어나 곧바로 업무보고 영도반에 진입한 뒤 얼마 안 돼 신호 통신구 지부 서기가 됐다. 1976년 6월 시닝철로분국의 선전부 간사로 임명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83년 28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칭하이성의 공청단 부서기로 임명됐다. 곧이어 공청단 서기 자리가 공석이 되자 그는 같은해 곧바로 칭하이성 공청단 서기 역할을 맡았다. 그는 6년동안 공청단 칭하이성 서기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공청단 중앙에 근무했던 인물들은 향후 공청단파를 형성하게 된다. 당시 공청단 중앙에서 근무했던 인물로는 후진타오 주석, 리커창(李克强) 상무 부총리, 리위안차오(李源朝) 중앙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류치바오(劉奇葆) 쓰촨(四川)성 서기, 장바오순(張寶順) 안후이(安徽)성 서기 등이다. 6년여동안 칭하이성 공청단을 책임졌던 쑹슈옌 역시 공청단파 핵심인물로 분류된다.

◆칭하이 성장까지 올라가다

1989년 초 공청단 서기 겸 대회주석단 주석인 그는 공청단 칭하이성 제8차 대회에서 공청단 서기에 낙선했다. 공청단 서기 선거에서 떨어진 뒤 그는 하이둥디(海東地) 부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울부짖는 농민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호주머니 돈까지 털어서 나눠준 사실과 곧바로 30만위안(약 4073만원)의 구조자금을 조달해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을 계기로 1992년 칭하이성 노동인사청 부청장으로 승진해 돌아오게 된다. 이후 그는 칭하이성 통계국을 거쳐 성위의 통일전선공작부와 조직부로 옮기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인사와 조직, 선전과 통일전선 부문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것이다.

쑹 부주석은 1998년 4월 칭하이성의 부서기로 당선됐다. 2004년 12월엔 칭하이성 대리성장에 임명된 데 이어 이듬해 1월 칭하이 성장으로 정식 선출됐다. 2004년 466억위안(약 7조9048억원)에 불과했던 칭하이의 지역총생산(GRDP)은 그가 성장으로 마지막으로 재임했던 2009년 무려 1170억위안(약 19조8467억원)으로 급증했다. 5년 만에 무려 2.5배 늘어난 것이다.

쑹슈옌의 남편 리징롄(李景連)은 당초 신호 통신구에서 일하는 신호공이었다. 2005년 당시 남편은 시닝철로 운전기사 학교의 당위 서기였다. 주위 사람들은 쑹슈옌과 리징롄 부부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쑹슈옌은 칭하이성 성장에 올라선 뒤에도 보모를 두지 않고 직접 시장을 다니며 반찬거리를 샀고, 직접 가족들의 식사를 챙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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