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36>쉬사오스 – 지질학 전공한 원자바오 최측근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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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0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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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7년 4월 신임 국토자원부 부장(장관)에 쉬사오스(徐紹史)가 임명되자 중국 정계는 가벼운 흥분에 들썩였다. 그동안 약체로 여겨졌었던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가 자신의 직계인사를 국무원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국토자원부 부장에 올려놨기 때문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고위관료 인사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이 증명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최측근 인사를 장관급에 임명하면서 국무원을 장악하고 있음이 무언중에 공표됐다.

원자바오와 가까운 인사들로는 마카이(馬凱) 국무원 비서장, 멍젠주(孟建柱) 공안부장, 한창푸(韓長賦) 농업부장, 마원(馬馼) 감찰부장, 장핑(張平) 국가발전개혁위원장 등이 꼽힌다. 이 중 쉬사오스는 원자바오의 최측근인사로 분류된다. 쉬사오스와 원자바오의 인연은 1982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원자바오는 간수(甘肅)성에서 근무하다가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부임받아 베이징에 입성하게 된다. 1980년부터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쉬사오스는 자신의 직속상관으로 훗날 국무원 총리에 오르게 되는 원자바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직속상관으로 만난 원자바오

쉬사오스는 매사 성실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원자바오를 대했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갓 올라온 원자바오는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쉬사오스를 총애했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쉬사오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원자바오는 중앙에 진출한 지 1년만에 지질광산부 부부장에 올랐다. 그리고 2년후인 1985년에 공산당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발탁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쉬사오스 역시 지질광산부 법규연구실에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갔으며 40세이던1991년에는 지질광산부 판공청 주임까지 올라갔다. 1991년 지방근무경험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는 원자바오는 쉬사오스를 광둥성 지질광산국으로 배치받도록 물밑에서 지원했다.

원자바오 역시 중앙이 아닌 간쑤성의 지질광산국에서 실력을 연마했던 인물이다. 베이징 지질학원에서 지질광산학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학위를 이수한 원자바오는 간쑤성의 지질국 기술자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가 지질국 부국장에 이른 1981년 쑨다광(孫大光) 지질부장이 현지 시찰을 나왔을 때 사전에 철저히 브리핑을 준비한 원자바오는 쑨다광 지질부장 앞에서 다양한 예를 섞어 막힘없이 설명을 했다.

쑨다광 지질부장은 그 자리에서 원자바오에게 ‘살아있는 간쑤성의 지도’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극찬했다. 이 일이 기회가 돼 원자바오는 이듬해 바로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베이징에 입성한 것.

◆원총리의 양성하에 승진가도

지방경력을 쌓게 하기 위해 광둥성으로 쉬사오스를 보냈던 원자바오는 그를 오래 지방에 내버려두지 않았다. 2년후인 1993년 쉬사오스를 국무원 판공청 비서1국으로 불러올리도록 했다. 당시 원자바오는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중앙서기처 서기였으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

1998년 원자바오가 중공중앙에서 국무원으로 근무처를 옮기면서 둘은 다시 공식업무상 상하관계로 만나게 된다. 원자바오는 금융담당 부총리였으며 쉬사오스는 판공청 비서1국 국장이었다. 이후 원자바오는 2002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으며 2003년에는 국무원 총리직을 거머쥐게 된다. 원자바오의 힘이 조금씩 커가고 있던 시기인 2000년에 쉬사오스는 국무원 부비서장에 오른다.

일각에서는 쉬사오스가 오랜기간동안 원자바오와 함께 해온 만큼, 업무는 물론 집안의 대소사까지도 함께 상의할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또한 원자바오의 아내 장베이리(張배<풀초밑에 倍>莉)로부터도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자바오는 2013년 퇴임할 예정이지만 2012년 열릴 제18대전국대표대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원자바오는 퇴임후에도 일정부분 정치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측근인사들을 요직에 배치시켜둘 정치적 수요가 있다. 때문에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쉬사오스는 국무원에서는 부총리급으로, 공산당 내에서는 정치국위원에 올라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무원 노른자위 국토자원부

쉬사오스가 현재 맡고 있는 국토자원부는 기능은 토지, 광산, 해양자원을 관리하고, 이의 보호와 합리적 이용방안을 수립, 시행하는 곳이다. 특히 토지분양이나 부동산개발 등을 비롯해 광산개발, 희토류개발, 해양석유개발 등 굵직한 사업을 관장하는 곳이기에 영향력이 크다. 게다가 걸려있는 이권이 대규모이기 때문에 쉽사리 부패할 수도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국토자원부는 1998년 지질광산부와 국가토지관리국, 국가해양국, 국가측량국이 통합돼 생겨난 조직이다. 쉬사오스가 1980년부터 1991년까지 근무했던 지질광산부가 국토자원부의 전신인 셈이다. 초대부장은 저우융캉(周永康) 현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다. 저우융캉이 2000년 쓰촨(四川)성 서기로 내려가면서 톈펑산(田鳳山)이 후임자로 국토자원부장에 올랐다. 하지만 3년후 톈펑산이 토지거래와 관련된 비리혐의로 낙마하면서 쑨원성(孫文盛)이 후임 국토자원부장으로 낙점됐다. 2007년 바통을 이어받은 쉬사오스는 제4대 국토자원부장이다.

◆중국 부동산 총관리자

쉬사오스의 업무영역은 국토개발, 광산, 해양 등으로 광범위하지만 주요업무는 단연 국토자원부 내부의 부패방지와 부동산가격 조정에 있었다. 특히 쉬사오스가 국토자원부장에 오른 후 중국의 부동산가격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투기매매가 성행했고, 부동산개발 영역은 부패와 추문이 만연했다. 2010년 인민일보사 산하 잡지인 인민논단의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중 62%가 관료사회에서 위함한 10대보직 중 국토부장을 1순위로 꼽았다. 실제로 국토자원부에서는 예상치 못한 부패사건이 종종 터져나오곤 했다.

2010년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쉬사오스는 “토지와 관련된 부패현상은 과거처럼 하나씩하나씩 천천히 처리하기 보다는 일거에 분위기를 일소하고 단칼에 도려내야 한다”며 “부패척결을 정책 최우선과제 중 하나로 삼아 부패를 억제하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쉬사오스는 부동산시장 조정에도 깊숙히 관여하고 있다. 그는 2010년 7월 다롄(大連)에서 열린 전국 국토자원청 청장좌담회에서 “앞으로 3개월 후에 중국 부동산 시장에 전면조정이 있을 것”이라면서 “전면조정이 이뤄지면 집값이 내려갈 것으로 보이지만 그 폭이 어느 정도일 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쉬사오스의 발언이 나온지 3개월 이후부터 중국 국무원은 부동산대출억제, 구매제한정책, 부동산보유세 신설 등 부동산대책들을 속속 내놓았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은 그의 발언 후 1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하락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시장이 냉각됐으며 더 이상의 상승을 막았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옌볜에서 젊은시절 보내

쉬사오스는 1951년 10월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969년 지린(吉林)성 옌벤(延邊)자치주 왕칭(汪清)현으로 하방돼 식품공장 노동자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었으며 이후 왕칭현 공업국에서 근무했다. 옌벤자치주에서 8년을 보낸 쉬사오스는 옌벤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휴가때면 이곳으로 향하곤 한다고 전해진다.

쉬사오스는 지난해 옌벤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1969년 상하이에서 옌벤선전단의 조선족 여성들이 추는 민족무용에 매료돼 하방지역으로 조선족자치주를 선택했다”며 “당시 생활은 무척 고통스럽고 힘에 겨웠지만 지금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그에게는 아직도 조선족 출신 친구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이듬해인 1977년에 26세의 나이로 창춘(長春)지질대학(현재 지린대학에 편입돼 있음) 수리공정과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1980년 곧바로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로 배치받아 베이징에 입성했으며, 이때부터 토지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11년후인 1991년 광둥성 지질광산국 부국장을 맡았으며 1992년 11월에는 선전시 지질국 국장을 겸임했다. 



◆쉬사오스의 ‘4다4소(四多四少)’

1993년 다시 중앙으로 돌아온 그는 2000년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전 국무원 부총리 우이(吳議)와도 훌륭하게 손발을 맞췄다. 그는 국토관련 업무 이외에도 시장 경제 무역, 비즈니스, 위생, 세관, 공상행정관리, 질량 검증 검역, 식품과 약품, 여행 등의 분야에도 직간접적인 간여를 했다. 이와 함께 쉬사오스는 당시 전국규범시장경제질서정돈 영도소조의 부조장을 맡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조직이다.

영도소조에서 쉬사오스와 함께 근무했다는 한 연구원은 쉬사오스의 ‘4다4소(四多四少)’론을 경제관찰보를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4가지가 많고 4가지가 적다는 뜻의 ‘4다4소론’이란 “시장 경제 질서를 파괴한 경제범죄는 실제로 많이 발생되지만 적발되는 경우는 적다. 적발된 경우에도 행정처벌은 많지만 사법처벌은 적다. 형사처벌된 경제사범 중에 공범은 많지만 주범은 적다. 실제처벌을 보면 집행유예같은 가벼운 형벌은 많지만 중형은 적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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