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농산물의 가격 변동이 심한 점을 이용해 미리 계약을 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내기도 한다고 업계 관계자는 입을 모은다.
이렇게 하면 재배자는 가격이 폭락 우려에서 벗어나 일정한 수익을 확보할 수 있고 유통업체는 출하 시점에 시세가 오르더라도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생활에 쪼들린 농민이 당장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간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에게 헐값에 수확하지 않은 벼를 넘기는 사례가 ‘입도선매(立稻先賣)’로 불렸지만 최근 유통업계에서는 이런 방식을 ‘사전 거래’ 또는 ‘사전 계약’으로 부른다.
사전 거래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한 유통업체는 올해 초 수박 1통에 9천원에 사들이기로 농가와 계약을 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수박이 출하됐는데 당시 시세는 1통이 1만5천원 선이었지만 이 업체는 9천900원에 소비자에게 ‘인기 상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마트는 올해 3월 강원도를 방문해 아직 파종도 하지 않은 배추 40만통을 계약했다.
몇 달을 기다린 끝에 출하된 배추는 7월 초부터 판매가 시작됐는데 미리 계약한 덕분에 시세보다 약 29% 저렴한 가격(3포기에 2천980원)을 판매가로 책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전 거래가 유통업체에 늘 만족스러운 결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계약 당시에는 싼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출하할 때 시세가 그보다 더 떨어지거나 품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마트 미국의 농가에서 체리를 구매하기로 사전 계약을 했는데 올해 5월에 캘리포니아 지역의 호우 때문에 상품이 출하되지 않아 사전에 계획했던 할인 행사가 차질을 빚었다.
또 다른 대형할인점은 1억원이 넘는 선급금을 주고 대파를 1단에 1천500원에 사기로 사전 계약을 했다가 낭패를 봤다.
계약할 때는 출하 시점에 시세가 1천500∼2천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가격이 2천500∼3천원으로 폭등하자 생산자 측에서 위약금을 물더라도 계약을 파기하는 게 낫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에 할인점 측은 필요한 물량을 제때 공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재협상 끝에 1단에 2천500원을 주고 파를 확보했다.
이 거래로 손해가 난 것은 아니지만, 선급금까지 주고 바이어가 산지를 찾아다니며 사전 거래를 한 효과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사전 거래는 소비자가 싼 가격에 물건을 살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좋지만 이를 보는 다른 시각도 있다.
농민이 판로를 장악한 ‘큰 손’의 교섭력 앞에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 어느 정도 불리한 거래를 감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1일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전계약으로 마트가 손해를 보는 경우는 많이 없다”며 “농민은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려고 마트와의 사전계약에 응하는 경우가 절대적이라서 출하 때 시세가 올라도 사전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밝혔다.
마트와의 지속적인 거래를 원하는 농민은 상대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때로는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반면 작황 변동이 심한 농산물의 특성상 거래 가격을 고정하기 어렵고 출하 때 가격이 폭등하면 대개 물량이 부족해지므로 유통업체가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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