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키 193cm 까무잡잡한 피부, 다소 마른 체형에 한껏 차려 입은 양복 조차 어색해 보이지만 이 사람이 바로 고급 주택의 대명사 ‘비구이위안(碧桂園) 부동산’의 양궈창(楊國强) 회장이다.
가난한 유년시절부터 생긴 절약습관으로 그에게서는 일반적인 부자의 이미지는 찾기 힘들다. 아파트 분양장소를 찾은 그를 보고 아직도 건설인부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차오건(草根, 풀뿌리)’ 부자로 불리는 양궈창은 17세까지 제대로 된 신발을 신어본 기억이 없다.
목동신분에서 건설 현장에 뛰어든 양궈창은 20세를 전후로 진(鎭) 정부 산하의 건축 회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건설일을 익히며 1990년대 초 총경리까지 승진한다.
이후 1992년, 신흥부자들에게서 사업 기회를 포착한 양궈창은 광저우(廣州) 순더(順德) 비장(碧江)과 구이산(桂山) 경계의 황무지를 헐값에 매입하고 총 4000세대가 입주 가능한 별장 건설을 추진했다. ‘비구이위안’ 1호의 탄생이다.
양궈창은 편리한 생활과 함께 자신의 부(富)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부자들의 심리를 활용했다. 그는 ‘고급 주택'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면서 부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당시는 한창 부풀어 올랐던 부동산 거품이 걷히던 시기로, 비구위안의 판매는 예상외로 저조했다. 4000개 중 성사된 계약은 단 3건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지인의 소개로 광저우의 한 사립 귀족학교를 방문하게 되었고 이 곳에서 다시한번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비구이위안 단지 내에 국제학교를 세운다면 자녀를 둔 부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양궈창의 예상은 적중했다.
게다가 덩샤오핑의 손자가 다녔다 해서 유명세를 탄 베이징의 명문학교인 징산(景山)학교의 분교라는 타이틀을 따낸 덕에 전국 각지의 '부자'들이 너도나도 몰려들며 금새 100%의 분양실적을 달성했다.
그는 또 비구이위안 학교 학생으로부터 이른 바 ‘교육저축금’으로 30만위안을 걷은 뒤 졸업 이후 찾아가도록 했다. 일종의 ‘보증금’으로, 양궈창은 이 돈을 ‘무이자 대출금’으로 융통하며 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국제학교 설립과 '학비 보증금' 도입은 아직까지도 중국 마케팅의 대표적 성공 케이스로 회자되고 있다.
순더비구이위안으로 자신감을 얻은 양궈창은 비슷한 전략으로 ‘5성급 호텔 같은 집’을 모토로 내걸고 화난(華南) 펑황청(鳳凰城) 등에 고급 생활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본래 대형 부동산 업체가 밀집되어 있는 광저우에서 양궈창은 경쟁 과열이라는 또 다른 고비에 직면하고 이때부터 기존의 고급 이미지에서 서서히 대중적 이미지로 전략을 수정한다.
그리고 ‘계급과 계층이란 누구든 초월할 수 있으며 지금은 더 나은 삶으로 도약하기 위한 과도기’라는 새로운 슬로건으로 서민 아파트를 선보이며 전국에 비구이위안 열풍을 일으킨다.
양궈창은 자산 11억8000만위안(한화 약 1925억원)으로 2004년 신차이푸(新財富) 중국 부호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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