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38>장핑 – 전문대 출신으로 800조원 부양책 입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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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0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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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8년 초부터 시름시름 앓던 세계경제는 그해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의 소비가 꽁꽁 얼어붙었고 세계 증시는 폭락을 거듭했다. 세계의 자산가치가 하락하고 거리에 실업자가 쏟아져나오면서 미국을 비롯한 유럽, 일본, 호주 등의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았다. 이 여파는 중국경제에도 막대한 충격을 줬다.

특히 중국의 고성장을 견인해온 수출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중국경제의 경착륙이 예견됐다. 그해 1분기 중국의 GDP는 10.6%, 2분기는 10.1%였으며 3분기는 9%였다. 당시 4분기 성장률은 5%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신문지상을 뒤덮었다. 그동안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자임해온 중국으로서는 연안지역 생산기지들의 줄도산이 우려됐다. 실업자가 양산돼 사회불안이 야기되는 상황은 중국공산당으로서는 끔찍한 악몽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국당국은 수출시장은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투자확대와 내수확대를 정책우선순위로 상정했다. 그리고 리먼브라더스 파산 2개월 후인 2008년 11월 역사에 남을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입안했다. 바로 4조위안 규모의 종합대책을 확정지은 것.

4조위안은 당시 환율로 한화 800조원에 육박했다. 우리나라 1년예산의 3배에 근접하는 대규모 투자 결정의 중심에는 중국경제의 컨트롤타워인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자리잡고 있었고, 발개위의 수장인 장핑(張平) 주임에 스폿라이트가 쏟아졌다.

◆역사적인 부양책의 주역

4조위안이 어디에서 조달되며 어디에 쓰여질지는 이듬해인 2009년 3월에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장핑 발개위 주임의 입을 통해 공개됐다. 장핑 주임은 “1조5000억위안은 철도, 도로, 공항, 치수 등 국가기반시설 건설에, 4000억위안은 임업지구, 개간지구, 탄광 판자촌 등의 저가임대주택 공급 등 서민생활개선에, 3700억위안은 식수, 전기, 도로, 주택, 가스 등의 농촌지역 주거여건 개선용 사용될 것”이라며 개략적인 자금용도를 설명했다.

장핑 주임은 “이번 자금집행 계획은 국제금융위기가 중국에 미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빠른 시간 안에 경제를 안정시키고 정책집행 효과를 보는 방향으로 짜여졌다면서 투자책임은 중앙과 지방이 나눠서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장핑 주임은 “감찰부와 재정부 등이 주도가 되는 24개의 감독조직을 구성해 엄격한 심사와 감독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장 주임은 4조위안의 투자금 중 중앙과 지방정부가 각각 1조1800억위안과 1조2500억위안을 투자하며 나머지는 민간자본, 사회기금 등의 투자를 유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방침이 중국의 발개위 수장의 입을 통해 확인되자 전세계의 주가는 반등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시 중국의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맞물려 석유화학, 기초소재, 건설자재, 기계장비 등의 수출이 호조세를 보이며 경기반등을 이어졌다. 일본과 유럽연합의 경제 역시 중국의 부양책에서 회복의 단초를 찾았다.

4조위안의 부양책은 세계적인 경기회복효과를 가져왔으며, 장핑 발개위 주임은 이 과정을 주도했고, 자신의 정책이 가져온 파급효과를 목도했다. 4조위안의 경기부양책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는 현재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당시 세계경제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모멘텀으로 작용했으며, 당시의 재정투자는 중국경제의 빠른 회복세를 이끌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내수확대가 정답이다"

이후에도 장핑 주임은 중국의 내수확장만이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견인할 것이라며 내수를 강조하고 있다. 장핑 주임은 2011년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열린 보아오(博鰲)포럼에서 “현재 중국 경제 발전에서 불균형, 불지속성 문제가 부각되면서 조화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며 “12차5개년계획(2011년~2015년까지의 경제계획)에서는 우선 국내 수요를 확대해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내용을 명확히 담았다”고 밝혔다.

장 주임은 “중국의 내수 확대는 장기적 전략”이라며 “내수, 특히 소비수요를 확대해나가기 위해 12.5계획 기간 국민 소비능력 확대, 고용촉진 정책 우선, 소득분배 시스템 개선, 사회보장시스템 확충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장 주임은 내수 확대를 위해 문화, 여행, 건강, 실버산업 같은 신 서비스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등의 방식으로 12.5계획이 끝나는 2015년까지 4천500만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무원 산하 발개위 주임으로서 중국경제를 총지휘하고 있는 장핑은 제18대전국대표대회가 열리는 내년이면 66세다. 현재의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위원에 올라서기에는 내년의 전국대표대회가 마지막 기회다. 그는 내년 정치국위원에 올라서든지 공직을 은퇴하고 다른 국유기업이나 연구소로 옮겨갈지의 기로에 서있다. 그는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의 신임을 얻고 있으며, 관료사회에서의 평판이 좋고, 특히 지방정부에서의 평가도 좋은만큼 충분히 국무원 부총리급이나 주요지역의 서기로의 승진이 가능한 상황이다.

◆전임자와 대비된 지방경력

장핑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기 6개월전인 2008년 3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에 취임했다. 당시 그의 직책은 국무원 부비서장이었으며, 그의 전임자는 마카이(馬凱) 현 국무원 비서장이었다. 마카이는 2007년 제17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의로의 승진이 유력했지만 지방 지도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승진이 누락됐다.

발개위는 2003년 국가계획위원회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의 부분직능과 국무원경제체제개혁판공실이 합쳐져서 출범했으며 초대 주임에는 마카이가 임명됐다. 세가지 부서가 합병된 만큼 마카이의 권한은 강력했다. 그는 환율, 화폐, 무역, 에너지, 외자기업, 국유기업, 물가, 노동, 외교, 지역, 과학기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지방정부의 과도한 개발정책에 빈번하게 제동을 걸었다. 지방의 민영기업들의 경영이 위축됐으며 경제성장에 목말랐던 지방정부들은 마카이의 리더십에 불만을 품었다.

때문에 후임 발개위 주임에게는 전임자가 갖지 못했던 지방정부와의 원활한 소통능력과 현실적인지방정부에서의 경험 등이 요구됐다. 당시의 인사수요와 현실상황에 적임자로 장핑이 지목됐다. 장핑은 40년을 안후이(安徽)성에서 일했던 만큼 지방경험이 풍부했으며, 2005년부터는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일을 하며 각 부처와의 조정능력을 배양해왔다. 게다가 장핑은 원자바오 총리의 신임마저 얻고 있었다.

발개위 주임에 장핑이 낙점되자 발개위 경제체제관리연구소 장하이위(張海魚) 연구원은 제일재경일보(第一財經日報)》와의 인터뷰에서 “장핑은 지방 경제업무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지방정부가 발개위 정책을 어떻게 관철, 시행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발개위가 지방정부와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그의 지방경험에 주목했다. 



◆전문대 졸업한 은행원 출신

장핑은 1946년 안후이성 쑤(蕭)현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안후이은행학교 대출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전문대를 마쳤을 뿐 석사학위나 박사학위가 없다. 때문에 발개위 주임으로 임명된 후에도 뜻밖에 전문대졸인 그의 학력이 주목을 받았다. 중국의 관료사회도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졸업장이 중요시여겨진다. 게다가 과거 중국의 대학들은 학업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졸업장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장관급 관료 중 유일하게 전문대학 졸업장만을 지닌 인물로서 상당한 희소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안후이은행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중국인민은행 차오현(巢)지점으로 배치받았다. 기층영업소에서 시작해 영업소 회계, 대출담당직원, 차오현현 재무판공실 간사 등을 지냈다.

장핑의 관료인생 첫번째 변곡점은 1980년에 발생했다. 인민은행 차오현지점에 근무하던 그는 추천을 받아 안후이성 당교 이론반에서 학습했다. 1년동안의 이론학습이 끝난후 장핑은 다시 차오현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차오현의 공상국 부국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후 두달 후에 안후이성 성정부 판공실로 배치돼 성장 비서를 했다. 안후이성 당교에서 학습할 당시 맺어놓은 성정부 고위관료들과의 네트워크가 도움이 된 것.

◆농업세 개혁의 선구자

그는 안후이성 성정부 판공실에서 5년동안 근무했다. 1985년 12월 장핑은 안후이성 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전임됐고 이 곳에서 7년여를 근무한 후 안후이성 우후(蕪湖)시 시장으로 승진했다. 1995년에는 안후이성 성장조리를 맡았고 이후 부성장, 비서장을 거쳐 1999년에는 상무 부성장, 2003년에는 안후이성 부서기까지 올랐다. 2005년 8월 안후이에서 40여년을 근무한 장핑은 발개위 부주임에 발탁돼 중앙무대로 진출한다. 5개월여 발개위 부주임으로 근무한 후 그는 국무원 부비서장으로 승진했으며 2008년에는 발개위 주임에 올라섰다.

그가 2005년 안후이성에서 중앙무대로 발탁된 것은 2000년 안후이성 부성장 시절 농업세를 폐지하는 과감한 실험을 시도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점이 인정받아서였다. 장핑은 2003년 CCTV와의 인터뷰에서 “농업세걔혁으로 인해 농민들의 세수부담이 평균 37.5% 줄어들었다, 농업세와 특산물세금을 없애니 정부관료들과 농민들 사이에 존재하던 마찰이 크게 줄어 양측의 관계가 개선됐고, 세금부담이 줄어든 농민들은 더 열심히 농사를 짓게 됐으며 유통구조 개선으로 농가소득이 증진돼 결과적으로 소득세만으로도 세수가 줄지않는 효과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2006년 중앙정부는 전국적으로 농업세를 폐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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