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0>후춘화 – 차차기 총서기 후보군 중 선두주자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1-08-11 15:4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12년 10월에 예정된 제18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가 끝나면 차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가 공식 발표된다. 시진핑(習近平)을 중심으로 한 5세대 지도부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 그리고 10년후인 2022년이면 새로운 총서기가 등극하게 되며 이들은 6세대 지도부를 구성하게 된다.

현재의 구조대로라면 시진핑 이후의 총서기 자리는 1960년대에 출생한 정치인들 중 한명에게 돌아가게 된다. 현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차차기 후보들로는 후춘화(胡春華, 1963년생)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서기, 쑨정차이(孫政才, 1963년생) 랴오닝(遼寧)성 서기, 저우창(周强, 1960년생) 후난(湖南) 서기, 장칭웨이(張慶偉, 1961년생) 국방과학공업위원회 주임, 루하오 (陸昊, 1967년) 공청단 제1서기, 쑤수린(蘇樹林) 푸젠(福建)성 성장 등 6명이 꼽힌다.

이중 가장 앞서있는 인물은 단연 후춘화다. 후춘화는 '리틀 후진타오(胡錦濤)'로 불리며 후 주석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 중국 정계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이 후진타오를 최고지도자로 낙점했고 장쩌민(江澤民)이 시진핑을 낙점했 듯, 후진타오 주석이 차차기 총서기를 낙점할 것이며, 그 주인공은 후춘화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다.

◆대륙을 놀래킨 베이징대 학생

후춘화의 후 주석과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베이징대학 중문과 졸업을 앞둔 후춘화는 성적이 빼어나 베이징의 좋은 직장으로의 배치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베이징을 선택하지 않고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에서 일하겠다고 결정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공청단 중앙 상무위원회 서기 겸 전국청년연합회 주석을 맡고 있었던 후진타오는 패기 넘치는 후춘화를 눈여겨 보게 된다.

후진타오는 후춘화의 선택을 전국에 적극 선전하기로 했다. 1983년 5월 중국공산당 산하 광명일보는 1면에 베이징대 후춘화가 자발적으로 티베트에 가서 일할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실었다. 이후 인민일보, 중국청년보, 베이징일보, 신화사, CCTV 등은 연이어 후춘화의 선택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후춘화는 한순간 유명인사가 됐다.

그해 7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베이징소재대학 졸업생 대회에서 후춘화는 학생들을 대표해 연설을 하게 됐다. 그는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소수민족 자치구역이 국토 총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수민족 지구는 할 일이 많은 땅이며 기회의 땅입니다. 한족(漢族)만의 현대화가 아닌 중화민족의 현대화를 위해 일하겠습니다”고 말했고, 대회에 참석했던 차오스(喬石), 왕전(王震), 야오이린(姚依林), 후치리(胡啓立), 덩리췬(鄧立群) 등 중국공산당 고위층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후주석 도와 계엄령 집행

두 사람의 인연은 티베트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 티베트 지구 위원회 서기였고 이 기간동안 후춘화는 공청단 티베트 지구 위원회 부서기를 맡았었다. 1989년 3월 라싸의 티베트인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키자 리펑(李鵬) 총리는 국부적인 계엄령을 선언했다. 당시 티베트 지구위원회 서기이던 후진타오는 계엄령을 집행했고, 후춘화를 반소요지휘부 제2판공실로 보낸다. 이 곳에서 후춘화는 준전쟁지역이던 소요지역을 샅샅히 훑으며 임무를 수행했고, 후진타오의 업무에 상당한 공헌을 하게 된다. 이는 후진타오가 후춘화의 성실함과 총명함, 우직함을 몸소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94년 중국공산당이 주최한 제3차 티베트 업무 좌담회에서도 둘은 다시 만난다. 당시 후진타오주석은 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으로 좌담회를 주도했다. 후 주석은 당시 티베트 공청단 서기이던 후춘화를 좌담회의 주비판공실(籌備辦公室)로 불러올려 그로 하여금 일체의 사무를 관장토록 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후춘화가 중앙당교에서 공부할 당시 후진타오는 중앙당교 교장이었다. 교장과 학생의 신분으로 둘은 다시 조우하게 된 것. 이후 2002년 후진타오가 공산당 총서기에 오르면서 후춘화는 쾌속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후춘화는 2006년 시짱자치구 상무부서기를 끝으로 티베트에서의 공직을 마감했으며, 공청단 제1서기로 자리를 이동해 베이징에 입성했다.

2년여 공청단을 관장한 후춘화는 2008년 허베이성 부서기로 이동했고, 이듬해인 2009년 1월에는후베이성 성장에 올랐다. 46세였던 후춘화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성장이 됐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나지 않은 2009년 11월에 공산당 중앙은 후춘화를 네이멍구자치구 서기로 발령낸다. 성장에 오른지 10개월만에 성 서기로 발탁된 것이다.

◆네이멍구 유혈시위를 겪고

초고속 승진을 달리던 후춘화는 올해 암초를 만난다. 네이멍구에서 민족간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 지난 5월 10일 네이멍구 시린하오터(錫林浩特)시 일대에서 몽골족 유목민 모르건(莫日根)이 광산업체의 석탄채굴과 초원훼손에 항의하다 업체 직원이 모는 트럭에 깔려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몽고족은 이에 격분했고 20여일동안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중국정부는 준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정리된 후 후춘화는 5월27일 시우치의 고등학교를 방문해 “이번 사건은 악랄하며, 분노에 떨게 한다. 광산개발을 하더라도 유목지와 초원에 아무 영향이 없고, 주민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해 몽고족들을 설득했다. 이어 7월에는 네이멍구 인민법원이 사고 운전자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네이멍구 사건 초기에만 하더라도 후춘화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이미 이를 극복해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네이멍구에서 별다른 과오없이 임기를 마친다면 후춘화는 내년 10월 열릴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또한 현재의 중앙위원직을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조기에 후계자로 부각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위원인 후춘화가 정치국위원을 뛰어넘어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두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시켜야 할 인사수요가 존재하지 않으며, 두단계를 뛰어넘을 만한 업적을 보인 게 아니기 때문. 하지만 차차기 후계자를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배양해야 하는 2017년의 전국대표대회에서 후춘화가 상무위원에 오를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간벽지에서 영웅을 내다

후춘화 서기는 1963년 4월 후베이(湖北)성 우펑(五峰)현에서 태어났다. 우펑현은 평균 해발고도 1500m의 산악지역으로 주변이 모두 투자(土家)족의 소수민족 자치구역이다. 운동화도 고무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산악지역을 짚신을 신고 다니다보니 그의 발바닥엔 항상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고 한다.

후춘화의 성은 원래 후(胡)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왕밍쥔(王明俊)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후창메이(胡長梅)였다. 후춘화는 7명의 형제자매 중 넷째였다. 후춘화의 원래 이름은 왕춘화(王春華)였다. 그가 소학교를 들어갔을 때 큰누나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왕밍쥔은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왕춘화로 하여금 어머니의 성을 따라 후춘화로 개명하게 했다.

후춘화의 남동생 왕젠화(王建華)는 위양관진(漁洋關鎭) 중학교의 부교장이다. 그는 후춘화가 어린 시절에는 말이 적었고, 성격이 비교적 내성적이었으며, 성적이 빼어났다고 말했다.

후춘화는 대학입시가 부활한 지 3년째이던 1979년 여름 베이징대 중문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학비는 고사하고 베이징에 올라갈 차비조차 없었다. 그는 대학 입학 직전 여름 방학 내내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모래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대가로 100위안을 손에 쥐었다.

아버지가 친인척에게서 꾼 돈으로 겨우 학비와 여비를 마련해 베이징에 올라온 그는 학교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하지만 성적은 항상 수위를 유지해 졸업할 때 ‘우수졸업생’ 상장을 받았다.

◆티벳인 싱크로율 100%

1983년 8월 티베트에 도착한 그는 공청단 시짱자치구위원회 조직부 간부를 시작으로 시짱청년보와 시짱호텔 근무를 거쳐 시짱자치구의 지방과 중앙에서 무려 19년을 근무했다. 후춘화는 티벳에서 ‘완전한 티베트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혈통은 한족이지만 티베트어에 능통하고 티베트 춤을 잘 추며 티베트 술도 잘 마셨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초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90년 2월 만 27세도 안 된 나이에 부청장급인 공청단 시짱(西藏)자치구 부서기에 올랐다. 1992년엔 만 29세에 청장급인 시짱자치구 공청단 서기에 올랐다. 1997년 12월엔 34세의 나이로 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돼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4년여를 근무한다.

당시 공청단 제1서기는 저우창 후난성 서기다. 후춘화는 2001년 다시 티벳으로 돌아갔으며 43세이던 2006년 11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직(장관급)을 전임자 저우창으로부터 넘겨받는다. 그리고 2008년 공청단 제1서기직을 루하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허베이성 성장에 취임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