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1>쑨정차이 – 공산당 총서기 노리는 옥수수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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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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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9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는 쑨정차이(孫政才) 농업부장을 지린(吉林)성 서기로 임명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후춘화(胡春華) 허베이(河北) 성장을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서기로 승진시켰다. 두명은 모두 1963년생으로 나란히 최연소 성 서기에 올랐다. 이같은 인사조치는 중국공산당이 후춘화와 쑨정차이를 유력한 차차기 후보로 보고 경력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춘화 네이멍구 서기는 차차기 후보군 중 선두주자로서 이미 전국적인 지명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인지도가 그에 못미치는 쑨정차이가 후춘화와 동일한 나이에 지방정부 서기로 이동한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쑨정차이를 차차기 후보군의 다크호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쑨정차이가 경력이나 사회공헌도 면에서 후춘화에 못미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후춘화가 베이징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자마자 낙후한 소수민족 지구인 시짱티베트자치구에 투신한 결단력이나 19년을 티베트에서 근무해온 커리어는 누구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후춘화는 공청단제1서기의 경력도 있고 무엇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태산’같은 지원을 받고 있다.

차차기 후보군들은 2017년에 상무위원에 진입될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아직 6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향후 자신에게 어떤 상황이 닥치며,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위기를 돌파해나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쑨정차이는 2009년의 인사로 인해 차차기 후보군 중 다크호스로 이름을 높히는 데 성공했다. 향후 중국의 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목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그는 농업전문가로서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로 워커홀릭인데다가, 원자바오 총리의 강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게 강점이다. 다만 짧은 지방경력과 비교적 낮은 지명도가 약점이다. 그 역시 후춘화와 마찬가지로 내년에 열릴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올라설 수도, 중앙위원직을 유지할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홀로 공부한 공부벌레

쑨정차이는 1963년 9월 산둥(山東)성 룽청(榮成)시 후산(虎山)진에서 출생했다. 농촌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현지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쑨정차이는 공부를 무척 잘했고, 성격은 온화했으며, 줄곧 반장을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진학한 3명중의 한명이었다.

1984년 쑨정차이는 산둥 라이양(萊陽)농학원(현재 칭다오농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곧바로 베이징시 농림과학원에 석사 연구생으로 들어갔고, 이 곳에서 중국 옥수수 연구의 대가인 천궈핑(陳國平) 교수의 문하에 들어간다. 천 교수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베이징시 옥수수 고문단 단장으로 일하면서 베이징시의 1무(畝• 1무는 약 200평) 당 옥수수 수확량을 1979년 229㎏에서 1996년 481.6㎏으로 끌어올린 전문가다. 쑨정차이는 이곳에서 옥수수 밀생(密生, 빽빽하게 심어서 재배하는 방식)을 집중연구했다. 석사학위를 획득한 후 그는 그 학교에서 농작물의 재배경작학 박사학위까지 따낸다. 박사를 딴 후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영국에서 1년동안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2001년 고향의 지방잡지인 ‘우롱런(五龍人)’에 기고를 통해 “1984년 천궈핑교수의 연구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춘제(春節)때도 고향에 가지 않고 도서관에서 책을 팠다. 도서관에 나 혼자 밖에 없어서 무척 추웠다. 어쩔수 없이 도서관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앉아서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전문가 케이스, 정치권 영입돼

쑨정차이와 당시 함께 공부했다는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옥수수연구센터의 자오쥬란(趙久然)은 “쑨정차이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농담도 곧잘했다. 하지만 학업에 매진하다 보니 여가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다. 옥수수 영양과 성장방면에 대한 연구로 베이징과학기술진보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쑨정차이는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하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쑨정차이는 베이징시 농림과학원 작물연구소 부주임으로 재직했고 이후 30세의 나이에 농림과학원 토지비료연구소 소장으로 등용된다. 오래 지나지 않아 농림과학원 부원장에 발탁됐다. 학계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그는 1997년 정치권에 입문할 것을 제안받는다. 이 제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며, 학자에서 공산당 총서기 후보로 도약하는 시발점이 된다.

당시 공산당 중앙은 각계 전문가들을 정계에 입문시키고자 했으며, 그 대상자 중 한명이 쑨정차이였다. 공산당은 쑨정차이에게 현 부서기 직책을 제의했으며 그에게 지역을 선택하도록 했다. 쑨정차이는 베이징시 순이(順義)현(현재는 구로 승격됐음)을 선택했다. 쑨정차이와 순이현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공무원은 “순이현은 농업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며 당시 대규모 공장을 유치하며 공장지대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쑨정차이는 자신의 전공인 농업을 살리면서 커리어상 공업에 익숙해지기 위해 순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출중한 실력에 행운까지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순이현에서도 엄격한 이론과 과학적인 방법을 견지했다. 워커홀릭인 만큼 손에서 일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상당한 성과와 좋은 평판을 바탕으로 쑨정차이는 빠르게 성장해갔고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1998년 순이현이 순이구로 승격되면서 그의 직급이 자연스레 처장에서 국장으로 올라가는 행운도 겹쳤다.

관료사회에 입문한지 5년만인 2002년 2월, 그는 중국공산당 베이징시 순이구 서기에 임명됐다. 2002년 11월 중국공산당 베이징시 제9차 당 대표대회가 열렸다. 중앙조직부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시 위원회 상무위원 선거는 경쟁선거로 치러야 했다. 16명의 후보자를 내서 15명을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베이징시 서기인 자칭린(賈慶林)과 시장 류치(劉淇) 등은 순이구 위원회 서기이던 쑨정차이를 시위원회 상무위원 후보자 명단에 넣어 탈락자로 삼으려 했다. 쑨정차이의 나이가 38세로 젊기 때문에 나중에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자칭린이 총애하던 베이징시 선전부장 장샤오위(蔣效愚)가 탈락하고 쑨정차이가 당선된 것. 베이징시 공산당원들의 장샤오위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이다. 쑨정차이로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원 총리의 신임을 얻고

순이구에서 승진을 거듭할 때는 자칭린 정지협상회의 주석과 류치 베이징시 서기의 지원을 받았지만, 농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눈에 들면서 원 총리계열 인사로 자연스레 편입됐다. 이후 그는 베이징시 부서기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2006년 12월 농업부장을 맡아 가장 젊은 장관급 간부가 됐다. 당시 원자바오 내각의 가장 젊은 구성원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현과 구의 경험만 가진 관리로서 중국 농업의 최고 책임자인 농업부장에 기용된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일었지만, 쑨정차이의 전문성이 높게 평가됐다. 식량증산을 독려하고 중국 농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발탁인사였다.

쑨정차이는 농업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식량 생산성 제고 ▲농민 수입 증대 ▲농업기술 혁신 ▲농산물 안전성 확보 ▲농업 서비스 강화 ▲농촌지역 현대화 ▲동물 질병 방역 강화 ▲농민 복지 확대 등 8대 목표를 야심차게 제시했다. 하지만 쉽사리 이뤄지는 목표들이 결코 아니었다.

2007년 연초부터 농산물 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민심이 불안해지자 농업부는 양곡 비축분을 시장에 풀어야만 했다. 이어 2007년 2분기에는 돼지고기 가격이 상승했다. 사료가격 인상에 돼지전염병이 겹친 탓이었다. 그해 5월에서 8월까지 돼지고기가격은 무려 41.98% 급등했다. 농업부는 돼지사육 보조금정책을 집행해야 했다.

이같은 장애물에도 그는 농업기술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또한 농민 소득개선에도 힘썼지만, 이같은 과제들은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한 정책목표들이라서 눈에 띄는 업적은 나오지 못했다. 그는 농업부장으로 3년여를 재직한 후 2009년 11월 지린성 서기로 이동한다.

◆북중경협 최전선 위치

그는 지린성에서 낙후한 공업단지의 선진화와 북중경협에 특히 매진했다. 특히 북중경협은 쑨정차이의 지린성 서기로서 최대의 업적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2010년 3월에는 지린성이 10년간 북한 라진항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지린성의 농산물이나 원자재가 라진항을 통해 동해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어 지난 7월에는 지린성과 라선시가 ‘라선 경제무역구 공동개발 계획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체결식에서 쑨정차이는 림경만 라선시 책임비서를 만나 “라선과 황금평•위화도 공동개발을 위한 양국 간 협정이 체결된 이후 지린성은 이미 라선 개발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을 마련했으며 교통망과 자원 개발, 농업 분야에서 합작하기로 북한과 합의했다”고 말해 향후 합작이 급물살을 탈 것임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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