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2>저우창 – '법치' 콘텐츠로 총서기 노리는 신예 공청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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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1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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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저우창(周强)이 후난성 대리성장으로 임명되던 2006년 당시 그는 가장 젊은 지방정부 성장이었다. 게다가 대리성장으로 임명되기 전 8년여를 공청단 제1서기로 근무했다. 왕자오궈(王兆國)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쑹더푸(宋德福, 사망) 전 푸젠(福建)성 서기,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에 이어 공청단제1서기직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저우창이었다. 그는 제1서기직을 후춘화(胡春華) 네이멍구자치구 서기에게 물려줬고, 후춘화는 루하오(陸昊)에게 물려줬다. 이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공청단제1서기라는 직급의 무게를 알 수 있다. 이에 더해 1960년대 출생자로서 가장 먼저 성장에 임명됐으니 당시만 해도 차차기 공산당 총서기 후부그룹 중 선두주자로 인식됐다.

하지만 3년후인 2009년 11월 후춘화가 네이멍구자치구 서기로, 쑨정차이(孫政才) 농업부장이 지린(吉林)시 서기로 발령을 받는다. 나란히 1963년생인 후춘화와 쑨정차이가 1960년생인 저우창을 앞질러 나간 것이며, 저우창으로서는 두명의 동생들에게 추격을 허용한 셈이다. 저우창이 후난(湖南)성 서기에 오른 것은 이듬해인 2010년 장춘셴(張春賢) 후난성 서기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서기로 부임해가면서다.

지난해 4월 장춘셴과 저우창의 직무교대대회에서 중앙조직부의 상무 부부장 선웨웨(沈躍躍)는 “정부 업무 중 민주적 정책결정과 과학적 결정방식을 중요시 여겨 스스로 인민대표회의와 정협의 견제를 받도록 했고, 법제정부, 책임정부, 청렴한 정부를 위해 노력했다”고 평했다. 공산당 중앙이 민주적인 정책결정과 법제정부에 대한 노력을 치하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후난에서 개혁정책 펼쳐

후난성에서 그의 행보는 실제로 개혁적이었다. 그는 후난성 성장에 임명되자마자 후난성 내 55개 행정 및 법 집행기관의 권력 리스트를 일반에 공개했다. 또 각급 행정기관의 주요 사업과 정책을 결정할 때 일반인을 참여시켜 포럼과 좌담회를 거치게 했다. 이 같은 조치는 인민들이 각각의 정책에 대한 행정 책임자와 결정권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했다. 이는 행정권력에 대한 견제작용으로 작용했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는 일련의 조치들을 당시 후난성 인민법원장이었던 장비신(江必新)과 함께 기획했다. 장비신은 저우창의 대학동창으로 현재 최고인민법원 부원장으로 2007년12월까지 3년동안 후난성 인민법원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저우창의 최고 정치참모로 불리고 있으며, 저우창이 향후 중앙에서 승진해 나간다면 그 역시 활동보폭이 넓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저우창이 2006년 “정부 공무원의 행위와 비행위는 모두 인민에 의해 법원에 기소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장비신과의 조율을 거친 파격발언이었다.

2008년 4월에는 후난성행정절차규정이 통과돼 즉시 실행됐다. 중국에서 첫번째로 지방에서 행정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공권력행사의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행정권 행사 절차를 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 2010년에는 후난성규범행정재량권법을 내놓아 공무원의 재량권의 한계를 명확히 했으며 제반 절차를 규정지었다. 이는 그해 인민망이 선정한 10대지방혁신제도 중 1위에 올랐다.

◆’법치성장’ 정치적 자산으로

그는 이 같은 조치들을 통해 ‘법치성장’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얻게 된다. 2008년 그는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로부터 ‘중국개혁개방30년이 낳은 걸출한 인물’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대중의 비판권, 특히 언론매체의 비판권을 보장하고 있지 않으며, 정치체제와 의사결정과정이 아닌 행정개혁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한계를 보였다. 저우창이 후난성 서기로 재직하는 기간동안에는 이 같은 규정이 잘 지켜질 수 있겠지만 저우창이 떠나면 이 법안들은 모두 사문화될 수 있다는 한계도 자주 지적된다. 중국의 시스템개혁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후난성의 지방정부 지도자로서 그는 체재개혁과 부패척결의 시스템화를 꾀했고, 자신의 권한하에서 상당히 보기드문 개혁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그는 공청단 시절 상당히 보수적인 길을 걸어왔다. 때문에 후난성에서의 개혁정책은 차차기 공산당 총서기를 노리는 저우창이 지극히 현실주의자라는 반증으로 읽혀지기도,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에 변화가 생겼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도, 정치적 업적쌓기의 일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저우창은 젊은 나이와 공청단제1서기의 경력에 더해 법치개혁이라는 정치적 콘텐츠를 보유하게 됐다. 이는 향후 커리어에 상당한 강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내년 열릴 제18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올라갈 후보군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내년의 인사이동과 상관없이 더욱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정치적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236개 공장 폐쇄 과감한 조치

그는 후난성에 부임한 후 둥팅(洞庭)호의 5급수 수질을 개선시키는 데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물고기가 살 수 없을 정도였던 둥팅호는 1년후 수질이 3급수로 개선됐다. 후난성 경제가 파탄난다는 지역여론에도 불구하고 폐수를 흘려보내는 236개의 제지공장을 문 닫게 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현재 둥팅호 인근에는 두개의 제지공장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에 이어 2008년 후난은 174억위안을 들여 상장(湘江)오염을 정비키로 했다. 저우창은 ”샹장을 중국의 라인강으로 만들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샹강 유역의 8개시는 수질개선 목표치를 제정했고, 문책제도를 도입했다. 공장설립 비준을 제한했고 신도시 지정도 제한했다. 오염물질 배출하는 기업에게는 경고조치와 함께 전력공급 제한, 물공급 제한, 대출금지 등의 조치를 내리도록 했다.

그에게는 분명한 업적도 있지만 아픔도 있다. 2008년 9월 4일 후난성(湖南) 샹시(湘西) 지서우(吉首)시에서 고금리 금융사기 피해자들이 시내 주요도로를 점거한 채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기차역까지 몰려들어 기차운행이 중단되자 현지 정부는 진압경찰을 대거 동원해 진압에 나섰고 10여명이 체포됐다. 금융사기단이 공무원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현지인들의 제보가 이어지면서 후난성 정부가 의혹의 눈길을 사기도 했다.

◆명절에도 손에 책 놓지 않아

저우창은 1960년 4월 후베이 황메이(黄梅)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주선교(周善敎)는 황메이현의 신카이(新開)진 부현장이었다. 저우창은 1978년 시난(西南)정법대학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학업에 매진했다.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저우셩(周勝)은 “저우창은 학업성적이 매우 뛰어났다”면서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 어문 실력이 출중했다”고 회고했다. 저우창의 어머니는 “명절이나 휴일에도 창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고 전했다. 저우창의 대학 동료인 위안치궈(袁其國) 최고인민검철원 검찰관은 “저우창은 취침을 위해 기숙사 불을 끈 뒤에도 혼자 회중전등을 켜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1985년 7월 민법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획득한 후 그는 사법부에서 일했다. 법규처의 직원에서 시작해 판공청 부주임, 법제사 사장 등으로 승진했다.

10년후인 1995년 저우창은 공청단 중앙위원회 서기처 서기로 보임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11년동안 공청단 중앙에서 일한다. 2년후 공청단 중앙위원회 서기처 상무서기(차관급)에 올랐으며 1998년에는 38세의 나이에 그보다 다섯살 많은 리커창으로부터 공청단제1서기(장관급)를 물려받는다. 중국언론들은 중국정가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음을 알렸다.

◆8년동안 공청단 1인자

공청단 제1서기로 8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당시의 업적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공청단이 공산당의 하부직속기구인 만큼 그는 보수적인 길을 걷는다. 그가 제1서기로 재직하는 동안 공청단은 ‘당이 결정하면 공청단은 행동한다(黨有號召 團有行動)’는 구호 아래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인다. 중국 정부가 1999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한 서부대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대학생 서부자원 프로그램’이나 창장(長江), 황허(黃河) 등 오염이 심각한 중국의 주요 강들을 살리는 ‘모친하(母親河) 보호활동’ 등은 그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박사복무단, 청년문명호, 청년지원자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청년활동을 전개했다. 이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공청단 산하의 중국청년여행사를 중국 최대의 여행사로 키워낸 것이다.

하지만 전임인 후진타오와 쑹더푸, 리커창과 비교했을 때 저우창은 공청단제1서기의 위치에서 너무 보수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2006년 공청단 산하 일간지인 중국청년보(中國靑年報)의 부속 주간지 빙점주간(冰点週刊)이 중국으로서는 수치스러운 과거인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을 다뤘다가 정간처분을 당한 일이 발생한다. 빙점에 대한 무리한 조치는 기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공산당 내부의 불만을 일으켰었다. 이후 2006년 9월 46세의 저우창은 후난성 대리성장으로 옮겨갔으며 2007년2월 후난성 인민대표대회에서 후난성 성장으로 정식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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