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43>류위안 – 군사위 부주석 유력한 류샤오치 총서기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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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8-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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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조용성 특파원) “가족이란 자신에게 좌절을 안길 수도 기회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족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항상 평상심을 가지고 좌절을 극복하고 기회를 살려 공공의 이익을 위할 뿐이다.” (류위안, 중국 차이징(財經)과의 인터뷰 중)

류위안(劉源)은 중국 현대사 비운의 정치인 류샤오치(劉少奇)의 아들이다. 류위안은 현재 총후근부 정치위원으로 계급은 상장(우리나라의 대장)이다. 내년에 열릴 제18대 전국대표대회와 이듬해 개최될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그는 4총부장 중 하나인 총정치부장으로 승진할 것이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이어 2017년 열릴 제19대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오를 유력주자로 꼽힌다. 그의 직책과 계급을 떠나 중국인들은 그에게 그의 아버지인 류사오치를 투영한다.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지도자의 아들에게서 문화대혁명 시대의 광기와 아픔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류샤오치와는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다.

◆중난하이의 왕자에서

류위안은 신중국이 탄생한 2년후인 1951년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태어났다. 혁명의 주역이었으며 1959년 국가주석에 취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부러울 것 없는 어린시절을 보냈다. 류위안은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했다. 13살 때에는 그 해 여름방학에 중난하이 경비부대에 들어가 이등병이 됐다. 그 이후 연속 3년의 여름방학을 군영에서 보냈다. 일등병에서 상등병으로 진급했고 ‘특급사수’와 ‘오호전사’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66년 15살인 류위안은 국기호위대원으로 선정돼 국가기념일 열병식을 참가했다. 그의 부친인 류샤오치는 류위안을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반역수괴의 아들로

하지만 좋은 시절은 여기서 끝이었다. 1967년 8월에 천안문광장에서 백만명의 군중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바로 10년여 동안 중국을 참극으로 이끈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 군중들은 류샤오치를 주자파 1호로, 덩샤오핑(鄧小平)을 주자파2호로 낙인찍고 모진 박해와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날 류위안은 6살인 여동생과 함께 천안문광장으로 압송됐다. 류샤오치 가족은 두시간동안 군중으로부터 모욕과 학대를 당했다. 국가주석이던 류샤오치는 신발을 한짝만 신은채로 비난을 들어야 했고, 학생들로부터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다.

구타가 최고조에 이를때 집회는 난장판이 됐으며 류샤오치와 그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홍위병들에 밀려 4~5m가량 떨어지게 됐고, 류샤오치는 필사적으로 부인에게 가까이 갔다. 1m 거리까지 다가가자, 왕광메이는 류샤오치에게 팔을 뻗어 손을 잡았다. 1~2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순간이 이 부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류샤오치는 격리됐고 류위안만이 접견할 수 있었다. 류위안은 밥과 수건, 약 등을 가져다주는 일을 맡았다. 얼굴을 볼수는 있지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금지됐다. 하루는 류샤오치가 식사를 마친후 류위안에게 “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라고 물었고 류위안은 속삭이듯 ”바로 뒤에 살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류샤오치가 더 물어보려고 하자 류위안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됩니다. 아버지"라고 제지했다. 류샤오치는 기가 막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것이 부자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끝이 안보이는 가족의 비극

류위안은 이튿날 더 이상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1967년 9월 류위안은 동생들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쫓겨났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농촌으로 하방돼 노동을 해야 했다. 그는 산서(山西)성 산인(山陰)현 바이팡(百坊)촌에 가서 7년의 농촌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인 왕광메이(2006년 사망)도 갖은 고초를 겪는다. 마오쩌둥의 네번째 부인인 장칭(江靑)의 질투를 산 왕광메이는 규탄대회에 서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는 수모와 박해를 받았다. 1967년에는 ‘미국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 투옥되기도 했다.

1972년에 류위안이 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보냈다. 그 해 8월16일에 베이징으로부터 전언이 내려왔다. 부친은 이미 사망했고 모친은 잠깐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하얘지는 듯 했다. 류샤오치는 1969년 박해와 고문을 못이겨 사망했으며, 아들인 류위안은 3년동안 아버지의 사망사실을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고된 노동, 각박한 삶에도 꿋꿋했고, 주자파 최고 범죄자의 아들이라는 호된 비판에도 의연하게 대처해왔지만 아버지의 사망소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고,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사라지는 듯 했다.

◆감정을 잃어버린 대학생

1975년 가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도움으로 류위안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징에서 노동자 직업으로 배치받았고 2년간 기술자로 근무했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중국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온 덩샤오핑은 1977년 대학입학시험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류위안은 원서를 넣는 족족 서류통과가 안됐다. 그는 아직 법적으로 범죄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덩샤오핑의 배려로 류위안은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한다.

1학년 때 받아본 역사교과서 속표지에는 ‘반역자, 내부 첩자, 공적 류샤오치를 무너뜨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강사가 수업할 때 문화대혁명의 주동자인 사인방을 비판하면서, 류샤오치도 함께 비판했다. 류위안은 이같은 수업을 들어도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나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서 주변 학생들과 교수 강사들은 미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고 전해진다.

류샤오치는 1980년에서야 복권됐다. 그해 5월17일 류샤오치의 장례식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고 중국 공산당 역사상 가장 억울한 누명은 비로소 벗겨졌다. 이듬해 대학을 졸업한 류위안에게는 이제 편안하고 유복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공산당은 베이징의 편안한 직업을 분배하려고 했지만 류위안은 뜻밖에도 기층을 선택한다. 그는 아버지가 살았던 허난(河南)성을 선택한다.

◆다시 농촌을 선택하다

당시 중앙의 또 다른 고위 간부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 시진핑(習近平)도 베이징이 아닌 기층의 하급관료의 길을 선택한다. 2000년 여름에 시진핑은 “당시 기층으로 가겠다고 먼저 자기 입으로 말하고 선택한 사람은 바로 류위안과 나 둘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시진핑과 류위안은 아직도 각별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위안은 1982년 허난 신샹(新鄕)현의 한 인민공사의 관리위원회 17명 서기와 주임 가운데 17번째의 부주임이 됐다. 처음에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온 이 대학생이 누군지를 몰랐고 서열 17위 관리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두 달 후 사람들이 새로 온 주임이 바로 류샤오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류샤오치를 좋아해 류위안까지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류위안의 신분이 알려진 그 날부터 지역에는 하나의 소문이 돌았다. 류위안이 간판을 따려고 농촌에서 왔다는 게 소문의 골자였다. 류위안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묵묵히 했다. 시간이 지나자 현지 농민들은 류위안을 다시 보게 됐고 “만약에 당신도 류주임처럼 여기 와서 ‘간판을 따려면’ 우리는 100% 환영합니다”고 말하게 된다.

그는 겸손하고 일을 열심히 했다. 1983년 류위안은 인민공사 주임이 됐고 1984년 만장일치로 현장에 당선됐다. 1985년 류위안은 정저우(鄭州)시의 부시장에 올랐고, 1988년 36세의 류위안은 부성장이 됐다. 당시 최연소 부성장이었다. 그의 고속승진에 대해 허난성 인민대표들은 "류위안이 류샤오치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겸손하고 성실하면서 많은 업적을 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차기 총정치부장 유력

1991년 양상쿤(楊尙昆)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류위안을 불러 대화를 나누던 중 "덩샤오핑 총서기가 군대와 지방의 간부들이 서로 교류를 해야 한다고 몇번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1992년 류위안은 중국인민해방군 무장경찰부대 수력발전지휘부 정치위원으로 발령받았다. 계급은 소장이었다. 군에 입대하자마자 장군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 때 병사들을 이끌고 싼샤(三峽)댐 건설공사에 참여하였다. 그가 담당한 공사는 배가 드나드는 갑문 공사였다.

이후 1998년 무장경찰 총사령부 정치위원으로 올랐으며 2003년에 인민해방군 총부근부 부정치위원으로 이동했고, 2005년 군사과학원 정치위원에 올랐다. 2008년 11월11일 류사오치 출생 1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좌담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직접 나서서 "류 전 주석이 중국 독립과 해방, 조국 발전, 인민의 행복을 위해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이후 2009년 상장으로 진급했고 2011년 1월 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정치위원에 올랐다.

총후근부는 군수, 보급, 후생 분야를 책임진 조직으로, 우리나라 국방부의 군수 관련 부서와 각군 본부의 군수 관련 참모부를 합친 기구로 볼 수 있다.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장비부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의 수뇌부 역할을 하는 사총부(四總部)로 불린다. 내년 18대전국대표대회를 전후해 총정치부장에 오를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류위안에게는 아들이 한명이 있다. 이 아들은 안타깝게도 정신 박약 환자로 알려져 중국인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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