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이끄는 현재 중국내 최대 정치세력인 공청단파는 2006년 10월 라이벌인 상하이방의 대표주자였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를 비리혐의로 낙마시키는데 성공한다. 여세를 몰아 상하이방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상하이시 서기에 자파 정치인을 앉혀 상하이시를 장악하고자 했다.
이 때 내세운 카드는 류옌둥(劉延東) 당시 통일전선부 부장과 리위안차오(李源朝) 장쑤(江蘇)성 서기였다. 두 명 다 중국인들의 신망이 높은 출중한 정치인이었지만 상하이방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상하이시 서기는 상하이방도 아니고 공청단파도 아닌 태자당 계열의 시진핑(習近平)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에게 돌아갔다. 시진핑은 2007년 10월 상무위원에 입성했고, 공석이 된 상하이시 서기는 역시 태자당 계열인 위정성(兪正聲) 당시 후베이(湖北)성 서기 차지가 됐다.
한달 뒤 공청단파는 이번에는 상하이시 시장에 자파 정치인을 진입시키려고 했다. 상하이시는 상하이방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며 현지 관료들의 텃세가 강하다. 때문에 당시 공청단파는 새로운 상하이시 시장으로 자파 정치인 중 리더십과 평판은 물론이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관료를 내세워야 했다. 상하이방의 견제를 잠재우고 현지 관료사회를 장악할 인사로 공청단파는 위안춘칭(袁純淸) 당시 산시(陝西)성 성장을 내세웠다. 2007년 11월 홍콩 등지의 언론은 상하이 시장으로 위안춘칭이 낙점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났고 상하이시 시장은 아직도 상하이방 계열인 한정(韓正)이 맡고 있다. 공청단파의 상하이시 장악에 대한 집념, 혹은 상하이방 견제를 위한 부단한 노력을, 또한 상하이방의 수성을 위한 치열한 저항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청단파의 상하이 장악을 위한 두번째 시도에서 내세운 카드가 위안춘칭이라는 데 현지 언론은 주목했다.
위안춘칭은 공청단파 핵심멤버다. 현재 산시(山西)성 서기를 맡고 있는 그는 내년 열릴 제18대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링지화(令計劃) 중앙판공청 주임, 궈진룽(郭金龍) 베이징 시장, 류치바오(劉奇葆) 쓰촨(四川)성 서기, 왕민(王珉) 랴오닝(遼寧)성 서기, 자오러지(趙樂際) 산시(陝西)성 서기, 양징(楊晶) 민족사무위원회 주임, 후춘화(胡春華) 네이멍구(內蒙古) 서기, 저우창(周强) 후난(湖南)성 서기, 선웨웨(沈躍躍)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장바오순(張寶順) 안후이(安徽)성 서기 등 공청단파에 속하는 정치국위원 후보자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 그에게 약점이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인사수요가 부족해 정치국위원에 올라가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공청단에서 17년 근무
위안춘칭은 1952년3월 후난성 산취(山區)에서 태어났다. 12세에 한서우(漢壽)현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이후 학교는 휴교했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어야 했다. 이후 1971년에서 1977년까지 한서우현과 창더(常德)지역의 공안국에서 근무했다.
공안국에서의 근무성적이 좋았던 그는 창더지구 공안국 서기의 추천을 받아 1977년 2월 공농병학생 자격으로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공농병학생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대학교에 입학해 3년만에 졸업하게 하는 제도로 위안춘칭이 마지막 기수의 공농병학생에 해당된다.
1977년에 대학입시가 부활했고 1978년에는 시험을 통과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리커창(李克强) 국무원 상무부총리가 베이징대 법학과에 진학한 것도 이때였다. 위안춘칭은 리커창 부총리의 같은 대학 같은 과 선배인 셈이다. 베이징대에서 공부하던 기간에 위안춘칭은 베이징대 공청단 부서기, 베이징대 학생회 주석 등을 역임했다.
1980년1월에 졸업한 그는 그해 공청단 중앙에 들어간다. 이후 그는 17년동안 공청단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그는 한잉(韓英), 왕자오궈(王兆國)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후진타오 국가주석, 쑹더푸(宋德福, 사망), 리커창 상무 부총리 등 5명의 공청단 제1서기를 겪게 된다.
공청단에서의 첫번째 보임은 공청단 중앙학교 부처장이었다. 1984년에는 공청단 중앙학교부 학생연합 사무실 주임에 올랐으며 1985년에는 공청단 중앙학교부 부부장으로 이동했다. 1987년에 그는 공청단 중앙학교부 부장으로 진급했으며 1992년에서야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진입한다.
◆법학, 경영학, 경제학 등 학위 갖춰
공청단에서 근무하는 17년동안 위안춘칭은 자기개발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 1990년에 중국정법대학교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97년에 후난(湖南)대학에서 국제상학원에서 관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그는 공청단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비서장으로 이동한다. 중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의 위안화(遠華) 밀수사건 당시 언론에 나서서 대변인 역할을 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서도 그는 학업을 지속했다.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위안춘칭은 베이징대 경제학원에서 이론경제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그는 ‘금융공생론과 성시상업은행연구’라는 학술서적을 출간하기도 했다.
법학, 경영학, 경제학 등 다방면의 전문지식을 갖춘 위안춘칭은 2001년 산시(陝西)성 부서기로 이동한다. 이후 2004년 2월 시안(西安)시 서기로 이동하면서 그의 업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대당부용원 등 관광산업 육성
위안춘칭은 시안시 서기를 할 때 전국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시 서기 중 한명이었다. 특히 2005년 4월 당대(唐代)문화를 주제로 한 대당부용원(大唐芙蓉圓)을 개장해 중국인들의 관광열기를 고조시켰다.
당나라 시대를 주제로 꾸민 이곳은 당 현종의 궁원이던 부용원 자리에 약 2500억원을 투입해 만든 관광시설이다. 위안춘칭은 개장식에서 “부용원은 시안의 독특한 가치를 지녔으며 부용원으로 대표되는 당대 문화를 세계에 적극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는 위안춘칭의 돋보이는 업적으로 남는다.
시안에서 관광사업을 일으킨 위안춘칭은 2006년 산시성 대리성장에 임명됐으며 이듬해 산시성 인민대표대회에서 정식 성장에 오른다. 성장에 오른 후에도 그는 산시성의 관광자원을 적극 활용하는 행보를 보인다. 2008년 4월부터 청명절이 공휴일로 지정된다는 소식을 들은 위안춘칭은 청명절에 옌안(延安)의 황릉에서 황제에 대한 대규모 공제(제사)를 지낼 계획을 했다. 당시 제사에는 중국 중앙과 지방의 당정군 지도자 8000여명이 모였다.
위안춘칭은 “5000년을 이어내려온 황제의 혼과 정신은 올림픽을 중국 땅에서 개최하게 했고 앞으로 양안 통일의 기틀이 될 것이다”며 제문을 읽어내려갔다. 신화통신은 “이번 공제에 참석하기 위해 자비로 타이완에서 날아온 일반인도 적지 않았다. 황릉 공제는 중화민족이 염황(염제 황제)의 자손임을 전 세계에 인식케 하는 행사”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58세에 성 서기 등극
2010년 4월 왕러취안(王樂泉)을 대신할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로 후난성 서기였던 장춘셴(張春賢)이 임명됐다. 이를 신호탄으로 6곳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다. 이는 2012년 제18대 전국대표대회와 맞물려 있을 대규모 인사조정의 전초전으로 여겨졌다. 후난성 서기로는 후난성 성장이었던 저우창이 임명됐다. 후임 성장으로는 간쑤(甘肅)성 성장인 쉬서우성(徐守盛)이 낙점됐다.
1개월 후 왕진산(王金山) 안후이성 서기를 대신해 당시 산시(山西)성 서기였던 장바오순이 후임에 임명됐다. 공석이 된 산시성 서기에는 산시(陝西)성 성장이던 위안춘칭이 임명됐다. 이로써 위안춘칭은 58세의 나이에 성 서기에 올라서게 된다. 2개월여에 걸친 인사조정으로 4곳의 성 서기가 교체됐으며 이 중 세명이 공청단파 핵심인 셈이었다. 이를 근거로 중국 언론들은 2012년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청단파가 대거 약진할 것으로 내다봤다.
위안춘칭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연 산시성의 낙후한 산업구조를 선진모델로 교체해나가면서 탄광안전문제와 환경보호 문제 해결이었다. 산시성은 중국에서 네이멍구자치구에 이어 두번째로 석탄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이 곳의 탄광은 대부분 1900년대 초반에 개발된 것으로 갱도가 길고 시설이 낙후해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그는 탄광안전문제와 환경보호 분야는 전임자인 장바오순의 정책을 대부분 계승했다. 하지만 산업구조조정으로는 석탄화학업의 육성을 내세웠다.

◆석탄화학산업으로 방향 잡아
산시성은 석탄화학업무를 경제 전환의 지주산업으로 간주하고 12차5개년규획(2011년-2015년) 기간동안 100만t급의 신형 석탄화학공업 프로젝트와 산업클러스터를 발전시켜 새로운 지주산업으로 확정했다.
산시성 12차5개년 규획에 따르면, 산시성은 산시성 북부, 산시성 동북지역, 뤼량(呂梁)지역에 3대 석탄화학공업기지를 배치해 차별화된 화학공업단지를 중점적으로 발전시킬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위안춘칭은 2015년이면 올레핀 총생산능력을 연간 340만 t, 석탄가스 총생산능력을 연간 150억m³에 달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위안춘칭 서기는 “산시성은 석탄화학공업을 발전시킬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며 “에너지 절감, 환경보호, 저탄소, 청정방식으로 석탄화학공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산업사슬을 연장하여 자원우위를 산업우위로 전환하고 자원형 경제에 디딤돌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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