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 Persimmons 2009 Acrylic on Canvas160x80_(각각 each),3점연작 triptych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내 고향 집 앞마당 가운데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옆 마당에도 바깥 마당에도 텃 밭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가을이 오면 모든 작물을 수확하여 돈과 양식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비교적 손질하기가 수월했던 감 수확은 집안의 노동력이 많을수록 좋았고 특히 아이들의 일거리였다.
감 잎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할 무렵, 아니 훨씬 전부터 이른 새벽 엄마의 잠 깨우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늦가을 아름다운 감 잎이 한 잎 두 잎 땅을 덮을 무렵이면 본격적으로 감나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우린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주워 먹는 감이 아닌 돈을 마련하는 감을 모아야 했다. 감 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떨어져 금이 가거나 상처가 난 감은 상품으로서 가치도 없지만 울궈도 맛이 없기 때문에 마치 그림을 그릴 때 조마조마 미치도록 이럴까 말까 기로에 서듯, 조심조심 감을 끌어내려야 한다.
밭에서 돌아온 엄마는 이렇게 딴 감을 큰 옹기 장독에 넣어 불에 달궈진 아랫목에 소금물을 끓여 넣고 이불로 뚤뚤 말아 밤새껏 두면 새벽엔 신기하게도 떫은 맛이 싹 가신 단감이 되곤 했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감을 곱게 닦고 광주리에 담아, 새벽 첫 차에 몸을 싣고 엄마는 그 감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서 감을 팔 때면 엄마가 “감 사세요”를 외치고 나도 따라서 “감 사세요” 라고 외쳤다. 엄마를 따라 큰소리로 “감 사세요” 를 외쳤는데, 이상하게도 내 소리는 정작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던 시골 생활, 내 인생의 목표로 제발 여기 고향 땅만 벗어나고자 매달린건 공부였다. 대학에 들어가 드디어 멀리 멀리 고향 땅을 벗어나 다른 일로 돈 벌이 투쟁할 때, 그때부터는 그 지겨운 고향 땅이 그리움으로 변했고 빨갛게 떨어진 감 잎은 그 어느 시(詩)보다도 강렬하게 내 귀 속에서 바삭거린다.
그렇게 지겨웠던 감나무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됐다면 난 감을 먹지도 않을테고 감히 사치스럽게 그것을 화폭에 담을 수도 없었을 거다. <오치균 작가의 말>
![]() |
감_Persimmons_2011_Acrylic_on_Canvas_120x120cm(각각_each),_2점 연작 diptych |
미술시장 블루칩작가 오치균이 4년만에 내놓은 신작은 '감'이다. 작품의 풍경 속에 감나무를 종종 담아왔지만 이처럼 감이 주제가 되는 새로운 시리즈는 처음이다.
24일부터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딱 10점만 선보인 오치균의 감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역동적인 표현이 압권이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열심히 따고 주워 잘 닦은 감을 모아서는 어머니와 함께 새벽 첫 차를 타고 시장에 나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감 사세요”를 따라 외쳤던 어린 시절. 오치균에게 감은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다.
10점의 작품에 등장하는 감은 다양한 시간을 담고 있다. 새벽의 동트는 찰라를 만나는 감, 한낮의 햇빛을 머금은 감, 넝쿨위로 감겨 올라간 감나무 등은 각각의 생명체로 꿈틀거린다.
![]() |
감_Persimmons_2010_Acrylic on Canvas_160 x 80 cm (각각 each), 3점 연작 triptych. |
붓 대신 손가락으로 화폭에 그려진 감들은 캔버스를 넘어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평면이지만 입체적인 느낌을 주며, 원근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도 특징이다.
작가는 "나의 그림은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나는 설명을 제거하고 본질을 보여주고 싶다"며 "나는 다만 대상이 나를 충동질해서 그릴 뿐"이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정영목은 "감’을 그린 여러 형태들의 그림들이 있지만, 동양화와 서양화의 전통적인 맥락에서의 어느 접점쯤에서, 오치균은 그가 구사했던 기존의 ‘재현’의 주관성을 넘어 보다 객관적인 태도로서의 ‘관념적인 감’을 그려냈다"며 "이것이 오치균의 이번 전시의 성과"라고 평했다.
전시 서문을 쓴 소설가 김훈은 “오치균이 보여주는 등불의 질감은 강력한 육체성이다. 오치균의 색은 움직이는 살이나 뼈와 같다. 기골이 꿈틀거리고 혈육이 느껴진다.”고 했다. 전시는 9월 20일까지.(02)519-0800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