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혁신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허권 제도가 오히려 산업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응용의 여지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특허권 본래의 취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권리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소송의 남발을 줄임으로써 IT시장의 과도한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에 힘이 실리고 있다.
◇올해 쏟아부은 소송 비용이면 모토로라도 인수?=29일 <구글노믹스>의 저자이자 미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제프 자비스(Jeff Jarvis)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혁신, 성장이 아닌 소송을 막기 위해 사용된 비용만 올해 무려 180억달러(약 20조원)”라며 특허 시스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구글이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한 금액이 125억달러다. 모토로라를 인수하고도 무려 6조원이나 남는 엄청난 비용이 모두 특허전문 변호사들을 위해 쓰였다는 뜻이다.
그는 “구글은 모토로라를 인수함으로써 불필요한 특허 공격을 막을 수 있게 됐고 결국 변호사를 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라며 구글과 모토로라의 협상은 결국 ‘문제 투성이(screwed-up)’의 특허시스템이 만들어 낸 비극이라고 강조했다.
소송 비용에 더해 특허권 확보 경쟁도 거품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애플·마이크로소프트(MS) 컨소시엄은 노텔의 특허권을 45억 달러에 인수하며 본격적인 특허권 인수 전쟁에 불을 지폈다. 구글도 특허권을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쏟아부어 모토로라를 인수했고 IBM의 특허도 경쟁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광풍에 힘입어 노키아, 리서치 인 모션(RIM)과 지금까지 생소했던 인터디지털, 이스트만 코닥 알카텔-루슨트 등의 기업도 인수합병(M&A)의 대상으로 떠오르면서 이들 주가는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구글의 최고경영자(CEO) 래리 페이지는 노텔 인수 협상이 끝난 뒤 “노텔의 특허권은 애플, MS 등 반구글 연합이 제시한 45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특허권을 둘러싼 경쟁이 비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정지훈 관동의대 IT융합연구소 소장은 “글로벌 특허 분쟁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비용이 혁신이 아닌 변호사들의 주머니를 흘러들었을 것”이라며 “법원이 좀 더 특허권 인정에 대해 엄격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수십 년 전 원천기술 등장 “노장의 호출?”=법정 소송의 도구로 활용되는 특허들의 상당수가 수십 년 전의 원천기술이라는 점도 특허 분쟁의 소모성을 반영하는 한 단면이다.
그 어느 산업군보다 시대를 앞서가야 할 IT산업이 수십년전의 과거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퇴행적 현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애플과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는 삼성은 애플 디자인의 독점권을 반박하기 위해 1968년 제작된 SF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의 한 장면을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다.
이 영화에는 우주인 2명이 태블릿PC와 유사한 모양의 기기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 1분 정도 등장한다.
10여년 전 나이트라이더라는 기업이 이미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더 태블릿(The Tablet)’도 독일 지방법원에서 삼성의 반박 증거로 제출되기도 했다.
IT전문잡지 네트워크월드가 MS가 주장하는 특허 기술을 추정한 결과 MS가 원천기술이라고 주장한 특허 중 일부는 콘텍스트 센서티브 메뉴(context sensitive menu system), FAT 16 파일이름 시스템 등은 MS DOS나 윈도 초기 버전에서부터 광범위하게 사용 중인 기술로 밝혀졌다.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한 것도 이미 수십 년 전 세계 최초로 무전기와 휴대전화를 개발하면서 모토로라가 축적한 원천기술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응용과 혁신이 생명인 IT산업은 결국 ‘누가 원조냐’의 주도권 싸움판으로 변질되고 만 셈이다.
최근 독일의 지적재산권 전문가 플로리언 뮐러가 “애플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모든 스마트폰과 태블릿PC 기술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특허권의 모호한 배타성을 지적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흠집내기’에서 ‘치킨게임’으로=흠집내기 목적으로 시작된 모바일 시장의 특허 공방은 이미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치킨게임으로 악화됐다는 것이 업계의 해석이다.
글로벌 모바일 업계가 사활을 걸고 전쟁을 불사하는 데에는 모바일 산업에서 밀릴 경우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콘텐츠 서비스를 포함한 전체 IT산업에서 한꺼번에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IT모바일 산업에서 업종 간 경계는 사라졌다. PC를 만들었던 애플은 아이튠즈를 통한 거대한 콘텐츠 공급자이자 라이언과 iOS 등을 개발하는 소프트웨어사가 됐으며 검색사업자 구글 역시 안드로이드 등 OS를 통해 하드웨어 사업자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자상거래에 주력하던 아마존은 강력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e북 시장을 넘어 태블릿 시장을 넘보고 있으며, 소셜네트워크사이트(SNS) 페이스북이 검색 시장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시장에 진출할 것이라는 소문도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제프 자비스가 안드로이드를 예로 들며 “아직까지 보류 중이지만 이제 곧 자동차, 가전, TV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기기에서 그 위력을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모토로라를 인수한 구글이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한 것도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며 “하나만 잃어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결국 사활을 건 특허분쟁으로 폭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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