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우아이잉(吳愛英) 사법부장은 지난 2005년 유일한 여성장관으로 중국 국무원에 입각한 이후 6년째 부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이후 2007년 마원(馬馼) 감찰부장이 장관직으로 국무원에 들어오면서 현재 중국에는 두명의 여성장관이 있다. 또한 우아이잉은 중국 건국 이후 스량(史良)에 이은 두번째 여성 사법부장이다.
중국의 사법부는 전국 감옥에서 형벌을 집행하며 범인에 대한 노동교화 작업을 감독지도한다. 또한 인민들에게 법제도를 교육시키며 새로운 규정들을 조직적으로 숙지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밖에 변호사와 법률고문 작업을 지도감독하는 등의 역할도 한다. 수사권을 갖고 있는 감찰부나 공안부와는 다른 성격의 부서다.
우아이잉은 2003년 당시 장푸썬(張福森) 사법부장의 후임자 격으로 사법부 상무부부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상무부부장에 올랐다는 것은 보통 차기 부장에 등극할 것을 의미한다. 이후 그는 2005년 제8대 사법부장에 올랐다.
우아이잉은 1951년 산둥(山東)성 창러(昌樂)현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1971년 산둥대학 정치학과 입학했다.

우아이잉의 아버지는 평범한 농민이며 문맹이었고, 어머니 역시 문맹이었다. 우아이잉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3자매중 막내로 태어나 언니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촌민위원회의 부녀위원장에 당선됐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인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문혁시절 우아이잉은 부녀위원장 겸 민병연대 부연대장도 맡았다. 한 지역 주민은 “문혁 당시에는 마오쩌둥(毛澤東) 이론을 외우는 일이 필수적이었는데, 우아이잉은 단연 빼어난 암기력을 보였다.
대학들이 공농병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하던 1971년 그는 지역당원들의 추천을 받아 산둥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공농병학생 1기생들은 모범노동자거나 사상이 무척 투철한 학생들로 꾸려졌다. 지연학연혈연으로 공농병학생에 뽑힌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우아이잉은 2년반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1973년 8월에 정치과를 졸업한 후 창러현 당교로 배치받았다. 이듬해 현지의 인민공사 부서기를 맡으면서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우아이잉은 고속승진을 이어갔다. 1975년 창러현의 인민공사 부서기로 이동했으며, 1976년 창러현 부서기, 인민공사 서기로 올라섰다. 1978년 문혁이 종료된 이후 우아이잉은 창러현 상무위원회 서기에 올랐으며 1982년 산둥성 부서기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89년에 산둥성 부녀연합회 주임에 올랐고, 1993년에는 산둥성 부성장이 됐다. 그는 산둥성 최초의 여성 부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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