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전 삼성 감독과 역대 최고 투수 1·2위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친 고인은 금테 안경을 끼고 역동적인 투구 자세에서 뿜어나오는 시속 150㎞를 넘나드는 빠른 볼과 낙차 큰 커브를 앞세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타자를 요리하던 마운드의 지배자였다.
신생 NC 다이노스의 구단주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밝힐 정도로 고인이 한국 야구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 뚜렷했다.
고인은 경남고 재학시절이던 1976년 군산상고와의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승자결승에서 당시 기록으로는 전국대회 최다 탈삼진(20개)을 작성하며 팀의 9-1 대승을 이끌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패자전을 치러 다시 올라온 군산상고와의 최종 결승에서도 삼진 12개를 솎아내며 팀이 5-0으로 우승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연세대를 거쳐 1981년 실업야구 롯데에 입단한 고인은 그해 17승1패라는 빼어난 성적을 올리고 실업야구 최우수선수·최우수 신인·최다승리투수 등 3관왕에 오르며 자신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 해에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계약금 61만 달러를 받는 조건에 계약을 마쳤으나 병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결국 한국에 남게 됐다.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한국의 우승에 힘을 보탰던 고인은 이듬해 연고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첫해에는 9승16패4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로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984년 51경기에 등판해 14차례나 완투하며 27승13패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이라는 괄목할만한 성적을 올리면서 ‘괴물 투수’의 출현을 예고했다.
특히 그해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3,5,6,7차전 등 총 5차례나 등판해 홀로 4승을 챙기면서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던 장면은 진정한 철완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당시 “1,3,5,7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해 이기겠다”고 선언했고, 그해 정규 시즌에서 284⅔이닝이나 던졌던 고인은 6차전 구원승을 빼고 1,3,7차전에서 모두 완투승(1차전 완봉승)을 거두는 투혼을 발휘하며 불멸의 역사를 썼다.
연투와 직구 위력에서 고인이 역대 최고의 투수로 통하는 것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올린 성적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도 고인은 1985년 20승, 1986년 19승, 1987년 14승을 거두며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1986년과 1987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선동열(해태)과 역사에 남을 선발 대결을 펼쳤으나 1승1무1패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고인은 현재 프로야구선수협회의 모태 격인 선수회 창립을 주도해 롯데의 ‘미움’을 샀다.
롯데는 ‘괘씸죄’를 적용해 1988년 11월 삼성의 간판투수였던 김시진과 고인을 맞바꾸는 보복성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야구에 흥미를 잃게 된 그는 1989년 후반기에서야 삼성에 복귀했고 8경기에서 1승2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1990년 6승5패1세이브라는 성적을 끝으로 고인은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통산 8년 동안 103승74패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기록을 남겼다.
통산 248경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80경기를 완투(완봉은 15차례)로 장식해 강한 어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논리 정연한 말투로 프로야구 선수들의 단합을 이끌었던 걸물답게 그가 은퇴 후 눈을 돌린 곳은 정치였다.
1991년 지방의회 선거 때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의 텃밭 부산 서구에서 ‘민주당’ 간판을 달고 출마했지만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했다.
이후 고인은 방송사 해설위원, 라디오 쇼 진행자, 시트콤 배우 등으로 색다른 인생살이를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외도’는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은퇴 10년 만인 2001년 한화 이글스의 부름을 받고 지도자(코치)로 야구판에 복귀해 2006년부터 3년간 한화 2군 감독을 지냈고, 2009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관으로 그라운드를 지켰다.
하지만 2007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대장암 때문에 야구인으로서의 생활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불치의 병마를 이길 수 있는 민간요법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던 고인은 지난 7월22일 대한야구협회가 마련한 군산상고와의 레전드 매치 때 몰라보게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야구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때 벤치를 지킨 고인은 명징한 목소리로 “살이 너무 쪄 식이요법으로 감량했는데 체중을 너무 뺐다. 지금 살을 다시 불려가는 과정이다. 다부지게 준비해 다음에는 꼭 던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팬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말이 되고 말았다.
고인은 당시 완연한 병색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를 연발하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등 끝까지 무쇠팔 투수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애썼다.
고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쌓아 올린 기록들을 되새기면서 야구 지도자로서의 재기를 노렸다고 한다.
하지만 끝내 병마를 떨쳐내지 못한 채 프로야구 구단의 1군 감독으로 뛰어보겠다는 목표를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고 팬들에게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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