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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시대 핵심100인] <55>지빙쉬안 – 헤이룽장 개발 선두에 선 공청단 6대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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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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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8년 3월 헤이룽장(黑龍江)성 서기로 부임해간 지빙쉬안(吉炳軒)은 1년6개월여의 준비작업 끝에 하다치(哈大齊, 하얼빈(哈爾濱)-다칭(大慶)-치치하얼(齊齊哈爾)공업지대 건설구 개발을 필두로 한 ‘8대 경제구’ 건설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았다. 대규모 투자가 수반되는 이 프로젝트들은 그동안 침체돼 있던 헤이룽장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동안 헤이룽장성은 지역 생산총액 증가율이 반락하고 공업 채산성이 감소하며 대외무역 수출입 총액이 축소되고 재정수입 증가율이 둔화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헤이룽장에 부임해온 지빙쉬안은 2008년부터 쉴새없이 지방 도시를 시찰했고,기업들을 방문했다. 헤이룽장성의 전반적인 상황을 직접 시찰하고 기업인들과 지역 관료들의 의견을 청취했으며 외부의 컨설팅도 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현지 공무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발주시켰다. 당시 그는 “헤이룽장의 지하자원을 토대로 과학적이며 친환경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산업들을 유치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대규모 개발구를 건설해 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지빙쉬안은 2002년 중국공산당 제16대 전국대표대회 당시 당 대변인으로서 중국인민들에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그는 독특한 허난(河南)성 방언을 구사하며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친근함을 남겼다. 이후 그는 허난방언을 쓰던 대변인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구가했지만 이후 헤이룽장성의 대규모 발전계획을 제시하면서 유능한 관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51년11월 허난성 멍진(孟津)현에서 출생한 그는 1975년에 공농병학생 자격으로 정저우(鄭州)대학 중문과에서 3년간을 공부했다. 이후 멍진현 핑러(平樂)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역임하다 1978년 현의 지도자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멍진현 판공실로 발탁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1982년 멍진현 차오양(朝陽)향(鄕)의 서기를 맡았으며 1984년 허난성 옌스(偃師)현 현장에 임명됐다. 또 2개월후 공청단 허난성 서기가 됐다. 



2001년 그는 중앙선전부 부부장에 올랐고 2003년4월 장관급인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으로 승진한다. 2005년 지빙쉬안은 중앙정신문명건설판공실 주임을 겸하게 됐다.

그는 중앙선전부에서 딩관건(丁關根)과 류윈산(劉雲山) 등 두명의 선전부장과 함께 중국의 매체를 관리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중앙의 관리를 강화시켰으며 기자들에게 신문기자증 발급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중앙선전부가 발급한 신문기자증을 지닌 기자들은 더욱 적극적인 취재활동을 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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