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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시대 핵심100인] <56>천취안궈 – 티베트서기에 임명된 리커창의 측근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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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9-2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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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지난 8월29일,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주석에 부임한지 4일째 된 천취안궈(陳全國)는 그날의 공무를 마치고 라싸(拉薩)시의 루구(魯固)지구를 방문해 그 지역 거주민들의 생활상을 둘러보았다. 취임 이후 시짱주민들과의 첫번째 스킨십이었다. 그는 주민들과 만나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라싸의 시민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곳에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방문해 자주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부터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시짱이란 대가족의 일원이 됐습니다. 저는 반드시 모두와 함께 생각하며 고민을 나누고 공산당 중앙을 받들어 더욱 살기좋고 풍요로운 시짱을 만들어나가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일단 그는 지역민들과의 부드러운 스킨십을 보여줬다. 이는 그의 전임자였던 장칭리(張慶黎) 현 허베이(河北)성 서기가 보여줬던 강경일변도의 정책과는 다른 유화적인 제스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서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중국의 시짱에 대한 정책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시짱을 비롯한 소수민족 정책은 중공 중앙이 결정해 왔다. 특히 시짱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중앙아시아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인 입지 때문에 중국의 핵심이익이 걸려있는 곳이다.

과거 시짱자치구 주석을 역임했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나 장칭리 서기와 마찬가지로 공산당 중앙의 결정을 얼마나 잘 실행해 내는가가 시짱자치구 서기에 대한 평가기준이다. 분리독립에 대해 분명하게 강경한 목소리를 냈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장칭리 서기는 시짱 서기로 6년을 근무한 후 최근 경제성장이 두드러지고 있는 허베이성 서기로 영전해 갔다.

같은 맥락에서 시짱의 서기는 중공 중앙의 신임이 두터운 관료들이 파견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장칭리 서기는 공청단 중앙에서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3년여를 근무한 경험이 있으며 후 주석의 신임이 깊었다. 천취안궈 서기는 리커창 국무원 상무부총리와 인연이 깊다. 공청단에서 일한 경험은 없지만 리 부총리와의 인연 때문에 천취안궈는 공청단파로 분류된다.

홍콩의 밍바오(明報)는 천취안궈의 시짱자치구 서기 임명을 두고 리커창 부총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밍바오는 “천취안궈는 리커창 부총리의 심복으로, 리 부총리가 상무위원에 진입한 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요직을 옮겨다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천취안궈의 리 부총리와의 인연은 1998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리 부총리는 당시 공청단 제1서기에서 허난성 성장으로 이동했다. 지방경험이 없었던 리커창에게는 현지사정에 밝은 조력자가 필요했다. 때마침 그당시 천취안궈는 허난성 부성장이었다. 당시 43세였던 천취안궈는 허난성에서 태어났으며 줄곧 허난성에서 근무해왔다. 1955년생으로 동갑인 둘은 서로를 도우면서 상당한 신뢰관계를 쌓게 된다.

2002년 리커창은 허난성 서기로 올라섰으며 이듬해인 2003년 천취안궈도 허난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천취안궈는 2004년까지 허난성에서 6년동안 리커창을 보좌한다. 이후 리커창은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옮겨갔고, 천취안궈는 허난성 부서기직을 계속 수행하게 된다. 



리커창은 2007년 제17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며 사실상 차기 총리로 내정됐다. 특히 리커창은 직계 공청단 선배인 후진타오 주석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으며 공청단 중앙에서 함께 일했던 수많은 동료들이 각계 요직에 포진돼 있어 강한 세를 형성하고 있다. 천취안궈로서는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셈이었다. 게다가 공청단 출신이 아니면서도 리커창과의 신뢰관계가 돈독한 천취안궈는 공청단파의 훌륭한 정치적 자산이다. 2009년 천취안궈는 허베이성 성장으로 부임했으며 2년후인 2011년 8월 그는 중국정치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시짱티베트자치구 서기로 영전해갔다.

천취안궈는 1955년 11월 허난(河南)성 핑위(平輿)현에서 출생했으며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3년 인민해방군에서 부역한다. 문혁이 종료된 이후 1977년 허난성 주마뎬(駐馬店)구 자동차부품공장에서 잠시 근무했으며, 대학입시가 부활한 첫해인 1978년 정저우(鄭州)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졸업후인 1981년 고향인 핑위현 신뎬(辛店)공사에서 2년여 근무한 이후 주마뎬구 판공실 비서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주마뎬구 부비서장을 거친 후 그는 1988년 허난성 수이핑(遂平)현 서기, 1994년 허난성 핑딩산(平頂山)시 조직부 부장을 거쳐 1996년 허난성 뤄허(漯河)시 시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왔다. 1998년 허난성 부성장에 오르면서 리커창이라는 인생의 귀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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