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자본들이 '치고 빠지기식'으로 아시아 외환시장을 교란하면서 나라 곳간을 텅텅 비워갔고, 있을 때는 정작 이를 관리하고 중심을 잡아줘야 할 당시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국제금융라인은 금융정책국 산하로 흡수돼 조기대응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위기 징후 보고는 무시됐고, 결국 권력 상층부는 '세계화'라는 그럴싸한 구호에만 집착한 결과, 한국 경제는 지금껏 그때 그 아픔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고 다시 일어선 한국 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두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기침체로 세계 경제가 나락에 빠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급등했고, 증권시장은 속절없이 추락했다.
당시 강만수 경제팀은 고환율정책을 추구하면서 원화값 추락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 속에서 얻은 값비싼 교훈을 되새기지 못한 관료주의가 가져온 피치 못할 실책이었다. 다행히 미국과 300억 달러에 달하는 통화스와프 협정으로 환난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2009년 우리 경제는 또 한 번 뒷걸음질쳤다.
글로벌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 역시 별반 나아진 게 없다는 지적이 크다. 오히려 지난 리먼브라더스 파산 때보다 더 엄중하다는 경고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지만, 관료들은 사태를 적극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IMF 외환위기와 리먼사태 당시의 지나간 테이프를 재생시켜놓고 있는 듯한 발언들만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협정 등 각국과의 협력은 물론 국민들에게 위기에 대한 협력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진정성 있는 제스처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무사안일 관료주의가 가장 문제
지난주 유럽발 재정위기가 국내 금융시장에 직격탄을 날리자, 정책당국은 50억~60억 달러에 달하는 달러를 시장에 푼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환율 1200원대 상승을 억제하긴 했지만 자칫 시장의 내성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 금융위기 당시에도 이같은 대응은 결과적으로 피 같은 외환만 낭비했던 전철이 있다. 이런 결과는 어렵사리 각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로 가까스로 무마되기는 했지만, 정책당국자들은 이번에는 그런 상황까지 내몰린 것은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과거 우리 사회를 수렁으로 빠뜨렸던 사건 때마다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무사안일과 초동대응 실패를 보는 듯하다.
한쪽으로의 쏠림을 막아야 한다며 시장에 개입하고자 하는 관료의 욕구가 크다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로서는 급격한 환율 등락이 기업들에게 불확실성을 키워 경영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을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손쉬운 방법보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려는 모습이 오히려 현명한 대처라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소규모 개방경제의 특성상 적절한 폴리시믹스(정책조합)가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환경임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 경제전문가는 "정부 정책이 근본적으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보다 진정성 있게 국민들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는 게 사태 수습의 관건"이라며 "정부가 자꾸 상황을 좋게 해석하도록 무리한 시그널을 보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컨트롤 타워 부재…사태 엄중함 직시해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뒤 각국의 정책협력이 급속히 느슨해지고 있다. 올해 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에서 184개 회원국이 정책공조를 하자는 데 합의하긴 했지만, 선언적인 의미에 머물고 있다. 이번주 전 세계인의 눈과 귀가 쏠리게 되는 유럽중앙은행의 그리스 구제금융안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지배하고 있다. 오히려 '질서있는 디폴트'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는 분석이 무게를 얻고 있다.
유럽발 재정위기 사태는 그리스 등 'PIGS' 국가를 넘어 프랑스와 미국, 영국 등 선진 각국들로 급속히 확산될 조짐이다.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경제에는 전 세계의 경기침체가 직격탄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최대의 정책목표인 물가안정은 아예 뒷전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재정위기가 실물로 전이되면서 경제성장 여력이 움츠러든 마당에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처지가 못된다는 자조섞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을 지경이다. 통화당국 수장마저도 "물가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서민들의 삶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일수록 경제 컨트롤 타워의 복원이 긴요하다며 기획재정부 등 정책당국의 분발을 촉구했다.
허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국제금융팀장은 "금리인상 등 거시정책 수단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정부는 미시적인 물가정책으로 가격통제에만 치중했다"며 "이는 70년대식 물가관리 정도의 단편적인 정책으로, 물가당국은 한은과의 공조를 기초로 한 대책을 마련,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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