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4-허베이편> 4-1 스자좡, 조자룡 “누구보다 듬직했던 아우”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2-06 13:1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조자룡 '누구보다 듬직했던 아우


常山有虎將 智勇匹關張 (상산유호장 지용필관장)
漢水功勳在 當陽姓字彰 (한수공훈재 당양성자창)
兩番扶幼主 一念答先皇 (양번부유주 일념답선황)
靑史書忠烈 應流百世芳 (청사서충렬 응류백세방)

상산 땅에 호랑이 같은 장수가 있으니, 용맹과 지혜가 관우 장비와 견줄만하다.
한수에서 공훈을 이루고 당양에서 이름을 날렸다.
두 번이나 어린 주인을 구하고 한 마음으로 선주께 보답하니,
그 충렬함은 역사에 길이 기록돼 후대에까지 영원할 것이다.

(아주경제 배인선 김현철 기자) 삼국지연의에서 상산 조자룡의 용맹 무쌍함과 충심을 노래한 부분이다. 나관중은 이 소설에서 조자룡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물로 묘사했다. 충심은 깊으나 자만한 관우, 용감하지만 경솔한 장비와 달리 조자룡은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영웅상의 표본으로 그려낸 것. 이에 따라 정치적 사상에 의해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다른 인물과 달리 조자룡은 만인이 흠모하고 동경하는 중국인의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생전에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아 백전불패의 용장이라 불리는 상산 조자룡의 매력을 한층 더 파헤치기 위해 취재진은 조자룡이 태어난 고향인 스자좡(石家庄) 정딩(正定)현으로 향했다.

△ 정딩, 자부심 넘치는 조자룡의 고향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 시내에서 북쪽으로 15km 되는 지점에 자리한 정딩현. 이곳은 약 2000년 전부터 군사요새지로 전쟁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래서 본래는‘백성들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한다(眞正安定)’는 뜻에서 ‘진정(眞定)’이라 불렸다. 그러나 청나라 때 옹정제가 즉위할 당시 황제의 이름인 ‘윤진(胤禛)’과 같은 발음인 ‘진(眞)’의 사용이 금지되면서 정딩(正定)으로 불리게 됐다.

예부터 군사 요새지였던 탓에 정딩현 곳곳에는 아직도 낡은 성벽이나 터가 남아있다. 정딩현 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에 올라가니 정딩현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정딩현 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

정딩현 고성(古城) 남문인 창러(長樂)문에서 본 정딩현 시내 전경.

양링차오(楊玲巧) 조자룡 사당 관리처 주임은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키며 “바로 이 남문 밖 서쪽 저기 어딘가에 조자룡의 생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며 “현재 정확한 고증을 마치고 재건 준비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은 생가가 있었다는 곳에 가 보았지만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정딩현 고성 남문인 창러문 서쪽 부근에 자리했다는 조자룡 생가. 현재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성문을 내려오며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페인트 칠이 마르지도 않은 듯 1400여년 전 세워졌던 건물 치고는 너무 새 것처럼 보였다.

정딩현 남문인 창러문. 지난 해 2월 춘제 때 불꽃놀이로 인한 화재로 소실됐다. 최근 재건을 마치고 조만간 일반인에게 개방될 예정이다.


이곳 안내원은 “북주(北周·557∼581년) 시대 처음 세워진 이 성문은 명(明)나라 초기 재건된 뒤 2001년에 복구 공사를 마쳤다”면서 “지난 해 2월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설)때 폭죽 놀이로 잿더미가 돼 이제 막 다시 건설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매년 춘제 때마다 뉴스에서 폭죽놀이로 발생한 중국의 화재 소식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로 인해 천여 년의 역사와 전통이 담긴 문화재가 소실됐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성문 아래로 내려오니 정딩현 출신의 수많은 유명, 학자 장군들의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조자룡 동상.

창러문 아래 수 많은 동상 중 유독 눈에 띄는 조자룡 동상. 짙은 눈썹과 영특한 눈매가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짙은 눈썹의 영특한 눈매, 그리고 늠름한 얼굴은 오늘 날 미남이라 손꼽히는 어떤 배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정딩현 곳곳에서는 ‘자룡’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앞의‘자룡’대교, ‘자룡’초등학교, ‘조자룡’ 대주점, ‘자룡’광장, ‘조운(趙雲 조자룡의 이름)’로에 이르기까지 조자룡은 마치 이곳 주민들과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듯 하다.

정딩현 입구에 위치한 자룡대교.

정딩현 시내에 위치한 조운로.


만날 때마다 “조자룡이 자랑스럽다” “조자룡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인물이다”등등의 말을 꺼내는 이곳 주민들의 조자룡을 향한 존경심와 우러름, 그리고 자부심이 취재진에게까지 전달됐다.

취재진이 유비의 고향인 줘저우(涿州)나, 조조가 첫 도읍을 세운 업성(鄴城)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꼭 그 지역과 관련된 삼국지 인물을 답하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유달리 정딩현에서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조자룡’이라고 답하니 이들의 조자룡 사랑을 알만하다.

오죽하면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조차 지난 1958년 당시 정딩현 양차이쿠이(楊才魁) 당서기를 만나 “정딩은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조자룡이 태어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건넸을까.

△ 자룡, ‘화려한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조자룡 사당 앞에서 있는 조자룡 동상.


조자룡의 이름을 따서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조자룡 사당 앞에는 과거 장판교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뛰어들었던 조자룡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서늘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 주군의 아들을 구하러 가기 위해 창 하나 들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든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와 깊은 충심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듯 하다.



‘조운묘(趙雲廟)’라 불리는 조자룡 사당 앞에서 있는 조자룡 동상. 과거 장판교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적진에 뛰어들었던 조자룡의 비장한 각오가 취재진에게까지 전달되는 듯 하다.

이곳 조운묘는 지난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총 400만 위안을 투자해 청 도광제 때 세운 조운묘 터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8000㎡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사당은 모두 청 나라 때 건축양식을 그대로 본떠 재건했다.


'조운묘'라 불리는 조자룡 사당. 지난 1996년 정딩현 정부에서 400만 위안을 투자해 재건했다.

역사 속 기록에서만 총 네 차례에 걸쳐 조자룡의 사당이 건설 된 바 있다고 하니 현대인 뿐만 아니라 옛 조상들도 조자룡에 대한 숭배는 지금 못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당 내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사의전(四義殿)’이 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 줘저우에서 방문했던 삼의궁(三義宮)이 삼국지의 명장면 ‘도원결의’의 세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를 모셔놓은 사당이라면 이곳은 여기에 조자룡까지 포함해 모두 네 영웅을 모신 곳이다.

실제로 진수는 삼국지에서 ‘유비는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서술했다. 조자룡이 유비로부터 관우와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아들을 두 번이나 구해주고 항상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충직한 신하를 어찌 피붙이같이 여기지 않으랴.

사의전 안에 모셔진 (왼쪽부터) 조자룡, 관우, 유비, 장비. 조자룡이 유비 바로 옆에서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사의전 안에는 유비가 가운데 앉아있고, 뒤편에 관우와 장비가, 그리고 바로 옆에 조자룡이 서 있다. 유비 바로 옆에 관우나 장비가 아닌 조자룡이 늠름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 곳에서만큼은 조자룡이 삼국지 역사 속 ‘화려한 조연’이 아닌 ‘당당한 주연’으로 거듭난 듯 하다.

△ 자룡, 백전불패의 용장


사의전을 둘러보고 나오니 곰 형상으로 잎을 깎아놓은 나무 인형마다 웬 무기를 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


나무 곰인형마다 손에 18반병기 하나씩을 들고 있다. 18반병기란 중국에서 18가지 무술을 펼치는데 사용되는 18가지 무기를 가리킨다.

양 주임은 “이것이 중국 무협소설이나 역사서에서 자주 등장는 18반병기(十八般兵器)”라며 “18반병기란 중국에서 18가지 무술을 펼치는데 사용되는 도(刀), 검(劍), 창(創), 모(矛), 극(戟) ,과(戈) 등 18가지 무기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18반 병기를 하나하나 살펴가며 길을 걸으면 양 옆 좌우에는 오호전(五虎殿)과 군신전(君臣殿)이 있고 길 끝 중앙에 조자룡 부자(父子)를 모셔놓은 순평후(順平候)전이 나온다. 순평후는 조자룡이 대장군으로 봉해질 당시 받았던 시호다.

순평후전에 모셔져 있는 조자룡상. 은빛투구와 갑옷을 입고 금색과 홍색 비단을 어깨에 걸친 채 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순평후전에 들어서자 왼편에‘인의(仁義)’, 오른편에‘상승(常勝 항상 이기다)’이라 써 붙인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조자룡의 깊은 의리와 충심, 그리고 그 용맹함을 네 글자로 표현해 놓은 것. 실제로 후대인들은 조자룡이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천하무적 용장이었음을 기리며 당시 그가 태어난 곳의 지명인 상산(常山)에서 뒷글자 하나만 바꿔 상승(常勝) 조자룡이라고 불렀다.

사당 중앙에는 조자룡이 은빛 투구와 갑옷을 입고 홍색과 금색 비단을 어깨에 걸친 채 늠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리고 사당 벽 가득히 그려진 그의 활약상을 담은 벽화가 시선을 끈다.

순평후전 내부에 그려진 벽화. 조자룡이 장판교 전투에서 유비의 아들 유선을 갑옷 안에 넣은 채 적진을 돌파하고 있다.


전투에서 단 한차례도 패하지 않는 백전불패 용장의 모습, 평생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는 듬직한 신하의 모범상, 그리고 사사로운 이익에 연연하지 않는 군자의 면모가 머리 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치듯 지나간다.

특히 장판교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단숨에 돌파해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오는 조자룡의 당당하고 우렁찬 기세는 마치 벽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그 용맹함이 실로 얼마나 대단했으면 부하들이 “조자룡 장군의 몸 전체는 실로 담덩어리(一身都是膽)다”라는 말을 했을까.

순평후전 한켠에 전시된 조자룡이 사용했다는 80근짜리 창. 실물크기와 중량으로 후대인이 제작한 것. 한 손은커녕 두 손으로 들어도 손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무게가 엄청나다.


순평후전 한 켠에는 조자룡이 자주 사용했다는 80근(48kg)짜리 묵직한 창 하나가 전시돼 있다. 약 2000년 전 조자룡이 사용하던 창과 실물크기와 중량으로 제작했다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취재진이 직접 들어보니 한 손은 커녕 두 손으로 들어도 손이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다. 이런 무거운 창을 한 손으로 이쑤시개 다루듯 휘둘렀다니 과연 조자룡은 중국 역사상 ‘창술’에 가장 뛰어났던 용장임이 틀림 없는 듯 했다.

△ 조자룡, 하루에 옷을 세 번 갈아입는 멋쟁이?

조자룡의 용맹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양 주임이 조자룡에 대한 흥미진진한 일화 하나를 꺼냈다.

장판포 전투 당시 이른 아침 조조가 산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 보는데 백마를 타고 흰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칼만 휘두르면 고꾸라지는 병사가 부지기수 아닌가. 그래서 조조는 “저 흰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고 부하는 “상산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조조는 이번에는 붉은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적진을 누비는 모습을 보고는 “그럼 저 붉은 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부하는 “상산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해가 질 무렵 조조는 또 자색 갑옷을 입은 한 장수가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그럼 저 자색 옷을 입은 장수는 누구더냐”고 물었고 이에 부하는 “역시 조자룡입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이 긴박한 전쟁터에서 하루에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는 장수가 있다니 그 호기가 대단하다”고 치켜세웠다는 이야기다.

사실은 조자룡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적군의 피가 흰 갑옷에 튀겨 낮에는 붉은 색으로,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는 자색으로 보인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조자룡의 호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설이 아닐까.

70세 넘은 나이에서도 노장으로 전쟁터를 누비다가 훗날 목욕을 하던 도중 ‘껄껄’ 웃으면서 호기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조자룡. 조자룡 광장 한복판에 한 손에 든 창을 우뚝 세우고 근엄하게 서 있는 9.9m 높이의 조자룡 동상을 뒤로 한 채 이곳을 떠나는데 금방이라도 그가“나는 상산 조자룡이다”고 외치며 뛰쳐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정딩현 시내의 조자룡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9.9m 높이의 조자룡 동상.


△ 이밖의 이모저모 볼거리

조자룡 고택 우물. 과거 조자룡 생가에서 발견됐다는 우물이나 지금은 조운묘에서 보관 중이다.

과거 조자룡의 말이 물을 마시던 곳.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됐으나 지금은 조운묘에서 보관 중이다.

조자룡의 생가에서 발견된 한순평후조운고리비. 청나라 광서황제때 조자룡의 용맹함을 기리며 세운 기념비다. 현재 생가는 복원 중이며, 기념비는 조운묘 순평후전에 보관 중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2024_5대궁궐트레킹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