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롯데그룹의 선양(瀋陽) 투자를 유치해낸 것도 천정가오의 작품이다. 그는 지난 8월 선양에서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을 만나 “롯데그룹과의 협력을 중요시 여기며 최근 건설되기 시작한 롯데월드가 쌍방의 적극적인 교류․협력을 통해 조기에 완공되기를 희망한다”고 지원 의사를 적극 밝히기도 했다.
이에 앞서 지난 7월 선양에서 열린 한국주간 행사 개막식에서 CGV, 하나은행, 산업은행, 롯데 등 우리나라 기업 12개 업체로부터 3400억원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 역시 천정가오 성장의 공이다.
당시 천 성장은 “열 돌을 맞은 한국주간은 한•중 우호 증진과 경제협력을 촉진하는 장이 됐다”며 “랴오닝성은 한국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랴오닝은 한국과 이웃이며 항공로과 해상교통의 입지가 좋고, 그동안의 장기적인 왕래로 형성된 우호관계가 있다”며 “함께 노력한다면 더욱 큰 사업성취를 이룰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의 강한 투자능력에 랴오닝의 지리적 입지와 풍부한 자원과 인력이 합쳐지면 막대한 비즈니스기회가 창출될 것”이라고 투자를 촉구했다.
1952년3월 랴오닝(遼寧)성 하이청(海城)현에서 태어난 천정가오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 하이청현 혁명위원회 사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공농병학생 자격으로 다롄(大連)해운학원 항해과를 입학한 그는 1975년 졸업이후 학원에 남아 선전처 사무원과 공청단 서기를 역임했다. 이후 다롄시 공청단에서 1985년까지 일한 이후 1985년 33세의 나이로 랴오닝성 창하이(長海)현 부현장으로 이동해간다. 그리고 1988년 시강(西崗)구 부구장 직위로 다롄에 다시 돌아온다. 이때부터 그는 1997년까지 다롄에서 근무한다. 당시는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서기가 다롄에서 승승장구할 때였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4년동안 보시라이는 다롄 시장이었고 천정가오는 다롄 부시장으로 호흡을 맞췄다. 아직까지도 보 서기와 천 성장은 깊은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97년 랴오닝성 성장조리(차관보급)으로 이동해간 천정가오는 2000년부터는 랴오닝성의 성회인 선양시 시장과 서기로 맹활약을 펼쳤다.
천정가오는 선양에서 7년을 일했다. 2000년12월 천정가오는 선양시장이 됐고 2005년에는 선양 서기가 됐다. 7년동안 그는 세계10대오염도시 중 한곳인 선양을 중국 10대행복도시로 만들어냈다.
랴오닝성 경제학회 회장인 펑구이성(馮貴盛)은 “선양시의 변화는 천정가오의 역할이 컸던 게 사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천정가오는 선양시 시장 취임식에서 ”내게는 세가지 꿈이 있다. 동북지역의 노회한 공업기지를 진흥시키고 선양을 동북지역의 중심도시로 만들어내고 선양이 전국 5위내에 들어가는 부성급 도시로 키워내는 것이 그것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천정가오가 선양을 맡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노후한 공업단지 개선이 아닌 도로정돈과 녹화사업, 오염처리 등 환경사업이었다. 다롄에서 오랫동안 일한 천정가오는 “환경사업을 펼치는 데 다롄에서의 경험이 주효했다”며 “다롄의 환경사업 노하우는 중국 최고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환경방면에 778억위안을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선양은 환경보호 모범도시가 됐고, 국가삼림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 2006년에는 성공적으로 선양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환경문제가 일단락되자 그는 투자유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난쯔베이이(南資北移, 남쪽의 자본을 북으로 이동시킨다)를 기본전략으로 택해 중국 남부지역을 상대로 투자유치활동을 폈다. 그는 2007년 5월 두차례 선양 대표단을 광둥(廣東) 성 주장(珠江) 삼각주 14개 도시를 누볐다. 결국 선양은 2007년 총 1300억위안에 달하는 1801건의 투자유치계약을 체결했다. 외자로도 50억달러를 끌어들이는 성과를 냈다.
천정가오는 12월 장원웨(張文岳)가 정년을 이유로 랴오닝성 성장식을 사임하면서 대리성장에 임명됐고, 이듬해인 2008년 정식 성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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