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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부자이야기] 시양그룹 ‘저우푸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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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10-2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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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후룬리포트가 해마다 발표하는 국 부호 리스트는 이슈를 불러일으켜 리스트에 오른 부호들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러나 2000년대 초부터 7년에 걸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중국 내화자재 및 비료업계 대표 시양(西洋)그룹의 저우푸런(周福仁)회장이다.

‘무명 부호’ 저우푸런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2006년, 랴오닝(遼寧)성 최고 부자 타이틀을 거머쥐고 나서부터다.

저우푸런 회장은 1957년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모두가 배고팠던 1970년대, 배우자를 찾는 것조차 경쟁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저우푸런은 줄곧 인기가 좋았다. 화려한 배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조각같은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었지만 총명한 두뇌와 부지런함이 만들어낸 사업수완을 사람들은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우푸런을 마을 생산대 소대장으로 추천했고 마을 부흥의 길로 인도해줄 것을 그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랴오닝성은 '식량 불모지'나 다름없었지만 광석 자원만큼은 충분했다. 특히 중국 최대의 마그네사이트 광산이 그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저우푸런은 마을의 유일한 재산이나 다름없던 마차 두대를 이용해 마그네사이트를 안산(鞍山)시에 내다팔았다. 그로부터 1년여, 마을 주민들의 평균 소득이 두배로 늘어났고 그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며 저우푸런은 본격적으로 내화자재 생산에 뛰어들었다. 매일 안산시로 마그네사이트를 실어나르던 저우푸런은 마그네사이트 분말을 이용해 석면타일을 생산하면 더욱 큰 돈을 벌 수 있음을 알게되었다. 그는 즉시 분말 생산용 가마 두 곳을 임대해 직접 생산한 석면타일을 내다팔았다. 중간 과정 없이 생산부터 유통까지 전부 해결하면서 그의 수익은 빠르게 늘어났다. 이후 저우푸런은 단숨에 동북 지역과 저장(浙江) 쓰촨(四川) 푸젠(福建) 등 지역에 7개의 가마를 추가로 만들어 증산에 들어갔다. 82년에는 광저우(廣州)에 판매전문 매장을 설립했고, 불과 2~3년의 시간 동안 그의 누적 수익은 100만위안을 넘어섰다.

그러던 중 저우푸런은 마그네사이트를 고온에서 가공하면 고온작업 설비에 사용될 수 있는 내화자재, 마그네시아 벽돌을 만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저온 가공을 통해 만든 고급 석면타일의 경우 최대 80위안에 불과하지만 마그네시아 벽돌은 최하급이라해도 350위안은 벌 수 있었다.

저우푸런은 즉시 2000여만위안을 투자해 마그네시마 생산 설비 건설에 착수했고, 88년 랴오닝 하이청(海城) 시양내화자재유한공사를 설립했다. 1995년 7년여만에 매출액이 5억위안을 돌파했다. 그러나 내화자재 업계의 경쟁이 가속화되며 성장드라이브에도 제동이 걸렸다. 저우푸런은 승승장구하던 여세를 몰아 93년에 철강분야로, 97년에 비료 시장에 눈을 돌리며 경영 다각화를 추진했다.

글로벌 시장 불황의 여파로 철강 분야에서 고전하는 듯 했지만 2002년 저우푸런은 '권토중래'의 기회를 포착했다. 선양(瀋陽)과 하이청의 철강 공장을 인수한 동시에 당시 중국 국내 철강 업계에 불던 순풍을 타고 주요 철강기업으로 자리 매김했다. 비료 시장에서는 5년만에 시장 점유율을 15%까지 끌어올리며 업계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증시 상장 안할 것, 낯선 분야에 진출하지 말 것, 시양을 다른 기업의 손에 맡기지 말것" 저우푸런 회장의 세가지 경영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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