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그는 리커창(李克强) 상무부총리와 동갑으로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제 8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이 학교는 1956년에 설립된 지역 명문이다. 기업인 출신에다 리 부총리와의 인연으로 인해 향후 리 부총리가 국무원 총리로 올라서면 먀오웨이 역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허베이(河北)성 창리(昌黎)가 조적인 그는 1955년5월 출생했다. 허페이 제8중학교를 다니다가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인근 지역으로 하방된 그는 1978년 허페이공업대학 내연기관학과에 입학한다. 1982년 졸업후 먀오웨이는 중국자동차공업총공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국무원 기계공업부 자동차사 부사장, 부총엔지니어 등을 역임하며 자동차와 관련된 업무를 하다가 1997년 둥펑자동차 서기로 자리를 옮긴다. 1982년부터 2005년까지 27년여를 자동차계통에서 일한 자동차전문가인 셈이다.
둥펑자동차에서 근무한 8년동안은 먀오웨이는 눈부신 실적을 일궈냈다. 1999년부터는 둥펑자동차의 사장에 올랐으며 이때부터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2002년 우리나라의 기아자동차, 장쑤웨다(悅達)와 함께 둥펑웨다(東風悅達)기아차를 설립했고, 2003년에는 일본 닛산 자동차와 50:50 투자비율로 둥펑자동차를 세웠다. 또한 같은해 일본 혼다와 역시 50:50 투자비율로 둥펑혼다자동차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주도했다. 미국의 엔진업체인 커밍스와도 합작을 맺어 자동차 부품영역으로도 사업을 넓혔다.
2000년에 흑자전환에 성공한 둥펑자동차는 이후 지속적으로 흑자규모를 늘려간다. 2000년 13억위안에 불과하던 순이익은 2009년 200억위안을 돌파한다. 2004년 미국의 비즈니스위크지는 먀오웨이를 ‘올해의 아시아 스타’로 선정하며 “먀오웨이의 리더십하에서 둥펑자동차는 중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5년 5월 먀오웨이는 우한시 서기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정치인으로서 활동에 들어간다. 먀오웨이는 우한의 핵심산업으로 자동차를 설정한다. 우한도시권을 만들어 우한을 중부지역 굴기의 선두주자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2007년 12월 우한도시권은 전국자원절약형 환경우호형 사회건설 종합배양개혁시범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8년3월 먀오웨이는 당시 새로 조직된 공업정보화부 부부장에 올랐다. 6명의 부부장중 서열 2위였으며, 에너지절약, 자동차 등의 분야를 관장했다. 그리고 2010년 2월 65세 정년으로 물러나는 리이중(李毅中) 공신부장의 후임으로 먀오웨이가 승진 임명됐다.
해외매체들은 먀오웨이의 초고속 승진의 배경을 제1기계공업부(기계공업부의 전신)에서 근무한 경력에서 찾았다. 기계공업부 출신으로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자칭린(賈慶林) 정협 주석, 리란칭(李嵐淸) 전 상무위원 등이 포진해 있다.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의 아버지인 황징(黃敬) 역시 이 곳을 거쳤다. 먀오웨이를 우한시 서기로 발탁한 사람 역시 당시 후베이성 서기였던 위정성이었다.
그는 공신부장으로서 전기차 산업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올해 4월 2020년까지 순수 전기차와 혼합동력차 등 신에너지 자동차의 생산과 판매를 500만대로 늘리는 내용의 다소 파격적인 `신에너지 자동차 발전 계획‘을 마련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1000억위안의 예산을 책정, 500억 위안을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 자동차 산업발전과 핵심기술 연구개발 및 상용화에 집중하고 나머지 500억 위안은 신에너지와 혼합동력 자동차 분야에 투입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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