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우리 기자) 풍부한 감성, 소박한 삶을 노래하는 ‘시인’. 냉철한 판단력, 불굴의 도전정신을 가진 ‘기업가’.
공통점을 찾기 힘든 두 가지 직업을 가진 사나이가 있다. 바로 중쿤그룹(中坤集團) 황누보(黃怒波) 회장이다.
지난 9월 시집 ‘작은 토끼’ 한국 발간을 기념해 서울을 찾기도 했던 황 회장은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포브스지 추산 8억9000만달러(한화 약 9500억원)의 자산을 가진 부동산 부호다. 리조트 등 25개사를 거느린 중쿤그룹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최근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리조트 사업을 벌이기 위해 황무지를 대거 사들여 뉴스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시'와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부동산을 만들고 싶다는 황 회장은 극도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황누보는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에서 태어나 두살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닝샤(寧夏)로 이주했다. 1년 후, 지방 조직 간부였던 아버지가 다수와 상반되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몰렸고, 고지식한 성격의 아버지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며 '고아'가 되었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 버려진 황누보는 이 때 처음으로 시를 쓰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1973년 중학교를 갓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해 농촌의 '지식청년'이 되었다. 1977년 '가오카오(高考, 중국 수능시험)' 제도가 부활하며 황누보는 닝샤인 최초로 베이징대 학생이 되었다. 반혁명분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였지만 명문대 졸업생이 되고 나니 대우가 달라졌다. 1981년 중국공산당 최고 조직 중 하나로 꼽히는 중앙선전부에서 그를 불렀다.
29세에 중선부 한 부처 처장을 꿰찰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황누보였지만 항상 무언가 결핍된 느낌이었다.
"처장이 됐으니 국장, 다음에는 부장으로. 중선부에서의 앞날은 이렇게 보장됐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인의 본성은 나에게 세속을 초월한 상상력을 불어넣어줬다."
10년간 근무했던 중선부를 박차고 나온 황누보를 기다린 것은 어린 시절에 버금가는 '고생'이었다. 사업에 필요한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명함도 팔고 인형도 팔았다. 경험이 쌓이면서 지인과 함께 아파트와 호텔 공사를 시작했고 4년간의 경험을 쌓은 황누보는 1995년 마침내 중쿤그룹을 세웠다.
이후 1996년 황누보는 안후이(安徽)성 황산(黃山)의 자연경관에 매료되어 황산 개발에 투자했다. 수백만위안을 들여 길을 내고 호텔을 지어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했던 훙(宏)촌을 역사를 간직한 마을로 재탄생시켰다. 2000년 황산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8년 중쿤이 개발한 황산 마을의 입장권 수익만 4억위안이 넘었다.
2003년에는 신장(新疆) 커쯔러쑤커얼커쯔 관광지 개발에 착수했다. 직접 관광자원 보호 방법을 모색했고 관광 상품 개발을 짜 현지 정부에 제출했고 물심양면 노력을 아끼지 않은 덕에 신장 5개 주(州) 66개 관광자원을 통합·개발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대형 부동산 개발과 레저타운을 건설, 잇따라 성공시키며 황누보의 중쿤은 업계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의 성공 비결은 '문화'다. 시인이기때문에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고 시인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황누보 회장이 평소 주변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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