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증시가 하락하는 요인으로는 중국경제의 경착륙에 대한 우려, 핫머니의 유출도 있겠지만, 막대한 양의 비유통주 물량과 상장사들의 불투명한 회계처리,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제도 등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이 같은 중국 증시를 점진적으로 개혁해 내야 하는 임무를 띈 인물은 지난해 10월 증권감독위원회 주석에 오른 궈수칭(郭樹淸)이다.
궈수칭은 11월 주주 수익에 대한 감독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상장사에게 배당금 정책과 시스템을 정비할 것을 지시했다. 상장을 희망하는 기업들은 공모설명서에 배당금 규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배당금 정책과 계획을 중요 공지사항으로 처리할 것을 규정화했다. 이 밖에도 그는 중국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도록 제도를 개혁하고 있다.
1956년8월 네이멍구 우란차부(烏蘭察布)에서 태어난 궈수칭은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사회과학원 법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한다. 박사과정중이던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유창한 영어는 이 시절 연마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88년 사회과학원을 졸업하고 국가계획위원회 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영입되면서 관료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가 국가체제개혁위원회에 주로 했던 일은 경제제도 개혁안 도출이었다. 이후 10여년을 국가체제개혁위원회에서 일한 뒤 1998년 구이저우(貴州)성 부성장을 거쳐 2001년에는 인민은행 부행장 겸 외환관리국 국장으로 발탁됐다.
그는 2003년 중앙후이진(匯金)공사를 세워 이를 통해 외환보유액을 담보로 위안화 채권을 발행해 부실에 빠져있던 국유은행들을 건져냈다. 그가 세운 중앙후이진은 중국의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의 주력 자회사다.
2005년 3월 당시 건설은행 장언자오(張恩照) 행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면서 행장직이 공석이 됐다. 그리고 그 공석은 궈수칭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7개월 후 건설은행은 홍콩증시에 상장됐다. 그가 건설은행장으로 역임하던 6년동안 건설은행의 자산은 3배로 늘어났다.
은행장으로서 그는 공식석상에서 “은행 뿐 아니라 중국 금융산업 전반의 서비스는 심각하게 낙후돼 있다”고 말하는 등 거침없는 개혁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왔다.
그리고 2011년 궈수칭은 증권감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그의 전임자는 현재 은행감독위원회 주석인 상푸린(尙福林)이다. 궈수칭이 증감위 주석에 오르자 유명 경제평론가인 예탄(葉檀)은 “또 다른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이라며 환영했다. 그는 “궈수칭은 시장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며 “위안화를 고정환율제에서 탈피시킨 저우 행장만큼 강한 개혁드라이브를 걸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건설은행장 시절 한 기자간담회에서 취미로 어떤 운동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간단히 “설겆이를 합니다”라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설겆이는 아주 유용한 식후운동이며 물을 아끼고 전기를 아낄 수 있다. 나는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항상 설겆이를 한다”고 대답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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