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河南)성의 성회인 정저우(鄭州) 서쪽에 접해 있는 싱양(滎陽)시의 쓰수이관(汜水關, 사수관)전(鎭) 후라오관(虎牢關, 호로관)촌에 위치한 점장대. 이 곳에 오르기 전 마을에 있는 상점의 주인에게 점장대의 위치를 물어보니 손으로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점장대는 여포가 장수들의 무예를 심사해 부장으로 발탁하던 곳이다. 정예군들을 조련하고, 이들의 열병을 받기도 했다. 추운 겨울 칼바람에 점장대가 위치한 야산은 을씨년스러웠지만 인근 지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세여서 여포의 기운이 뿜어나오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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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대 오르는 돌길. 좁고 가파를 길을 한참동안 올라가야 점장대에 오를 수 있었다. |
30여분 동안의 등산끝에 점장대에 올랐다. 점장대는 북쪽으로는 호뢰관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황허(黃河, 황하)의 물줄기를 등지고 있다.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1800년 전에도 점장대를 둘러싼 황하 물줄기는 말없이 도도하게 흘렀을 것이다.
여포는 156년 네이멍구(內蒙古)에서 태어났다. 병주자사 정원(丁原)의 부하로 관직에 올랐지만, 이후 정원을 죽이고 동탁(董卓) 수하에 들어간다. 당시 동탁에게는 이각(李傕), 곽사(郭汜), 화웅(華雄) 등의 걸출한 장군들이 있었지만 여포는 단숨에 이들을 뛰어넘어 통탁 휘하 최고 서열의 무장에 등극한다. 그렇지 않아도 당대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던 동탁은 여포를 손에 얻자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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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대에서 내려다본 황하의 모습. |
후한말 189년 20만 서량(西涼)병을 이끌고 한의 수도 뤄양(洛陽, 낙양)에 입성한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황제인 헌제를 옹립한 후 자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여포를 얻은 후 동탁은 소제와 황태후까지 독살하고 황실의 재산을 모조리 탈취해 1인 공포정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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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대에서 내려다본 정경. 이 일대가 모두 여포성 관내였다. 저 멀리 호뢰관 계곡이 보인다. |
동탁의 신임을 얻으며 서량병의 병권을 통솔하게 된 여포는 이 곳 점장대에서 숱한 당대 영웅들을 부장으로 육성했다. 당시 여포의 용맹을 흠모한 각지의 무장들이 그의 부하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으며, 그들은 점장대에서 여포에게 자신의 무공을 검증받은 후 부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여포의 심사를 받기 위해 점장대 아래에 서는 자체가 영광이었을 것이다.
점장대에서 내려와 장수들이 무예를 뽐냈을 곳에 서서 점장대를 올려다 보았다. 점장대 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 이에 더해 당대 최고의 무인인 여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면 절로 위축됐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무예실력을 합격 받은 장수라야 비로소 점장대에 올라 여포에게 부장 사령장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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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대에서 내려다본 황하의 모습. |
이렇게 시험을 통과한 부장들로는 고순(高順), 장료(張遼), 송헌(宋憲), 위속(魏續), 장패(臧霸), 학맹 (郝萌), 후성(侯成) 등이 있다. 고순은 공격한 적은 반드시 패퇴시킨다는 뜻의 ‘함진영(陷陣營)’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포와 함께 최후를 맞는다. 고순과 함께 여포군의 원투펀치였던 장료는 조조에게 투항한 후 허페이(合肥)에서 손권을 패퇴시켰다. 이후 오나라에서는 장료가 버티고 있는 한 허페이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기로 한다. 장패는 훗날 조조에게 투항해 집금오(수도경비를 책임지는 장군)까지 오른다. 기라성 같은 장군들을 거느리고 20만 서량병의 사열을 받았을 여포의 눈에 지방제후들의 군대는 한낮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리라.
‘인중여포, 마중적토(人中呂布, 馬中赤兔. 사람 중 으뜸은 여포고 말 중 으뜸은 적토마다)’라는 칭호를 받으며 천하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됐던 여포의 실력이 천하인들에게 첫 선을 보이게 된 계기는 호뢰관전투다. 동탁이 집권한지 1년후인 190년 여포의 명성을 역사에 떨칠 큰 전쟁이 벌어진다. 바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돼 낙양 인근의 진류(陳留, 지금의 카이펑<開封>인근)에 진을 치고 낙양공격을 도모한 것이다.
동탁의 전횡을 참지못한 중국 각지의 18제후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진류에 모였다. 이들의 기세는 등등했지만 낙양으로 가는 길목인 호뢰관을 깨부수지는 못한 채 일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관우(關羽)가 화웅의 목을 베자 18제후군의 사기가 급상승했고 동탁군은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에 낙양에 머무르던 동탁군의 에이스 여포가 직접 여포성으로 와 18제후군과 대치하게 된다. 점장대가 위치해 있는 곳이 여포성이다. 토성인 여포성은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여포성에 도착한 여포는 전황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방천화극을 잡아들고 적토마에 올라 여포성을 나서 18제후군의 진영으로 곧바로 돌격한다. 3000명 정예 철기병이 그를 뒤따랐다.
현지의 향토사학자 장번산(張本善)이 여포성의 성문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는 “여포의 존재는 그 자체로 동탁군의 전투력을 수배는 상승시켰다”며 “여포가 적토마를 달려 쏜살같이 성문을 나갈 때 바로 이 곳에서 동탁군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해 지축이 꺼질듯한 함성을 질렀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적토마가 쏜살같이 내달려 호뢰관 너머 적진에 가까워지자 18제후군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여포의 가공할 만한 무공을 직접 목도하게 된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는 18제후군의 눈에 비친 여포의 첫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溫侯呂布世無比(온후여포세무비),
雄才四海夸英偉(웅재사해과영위)。
護軀銀鎧砌龍鱗(호구은개체용린),
束髮金冠簪雉尾(속발금관잔치미)。
參差寶帶獸平吞(참차보대수평탄),
錯落錦袍飛鳳起(착락금포비봉기)。
龍駒跳踏起天風(용구도답기천풍),
畫戟熒煌射秋水(화극형황사추수)。
온후 여포는 천하에 비할자가 없으니,
천하 재사들이 영웅이라 찬사하네.
갑옷의 장식들은 용의 비늘처럼 섬세하고
묶은 머리에 쓴 금관에는 꿩 깃털이 꼽혀있네.
옥대에는 포효하는 짐승의 얼굴이 조각돼 있으며
비단 도포에는 봉황의 날개짓이 수놓아 있었네.
적토마가 한번 뛰어오르니 하늘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방천화극 휘두름에 불꽃이 튀어 섬뜻한 기운이 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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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높은 곳에 보이는 게 점장대 |
18제후군의 적진에 뛰어든 여포는 그야말로 ‘살육’을 시작한다. 반동탁연합군 5진을 맡고 있던 왕광(王匡)의 부장 방열(方熱)의 목이 먼저 떨어졌다. 동료의 죽음에 격분한 왕광의 부장들이 일제히 여포를 공격했지만 모두 추풍낙엽처럼 주살됐다. 겁먹은 왕광은 달아났고, 여포는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한 왕광의 군대를 유린했다. 상당(上黨)태수 장양(張楊)의 부장 목순(穆順)이 여포에 도전했지만 방천화극의 한번 번쩍임에 목이 떨어졌다. 이어 북해(北海)태수 공융(孔融)의 부장 무안국(武安國)이 50근이나 되는 철퇴를 휘두르며 여포를 가로막았으나, 여포는 방천화극으로 철퇴를 쥐고 있던 왼팔을 잘라버렸다. 여포는 질풍처럼 제후들의 진지를 짓밟으며 돌진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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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대 오르는 돌길. 좁고 가파를 길을 한참동안 올라가야 점장대에 오를 수 있었다. |
여포의 기세를 제지한 것은 유비, 관우, 장비 3형제였다. 3형제는 여포를 협공했고 여포는 협공을 당해내지 못한채 여포성으로 후퇴한다. 여포와 철기병이 여포성에 들어온 후 성내 병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추격해온 연합군들을 상대로 수성에 나선다. 여포의 군사들은 화살과 돌을 소나기처럼 떨어뜨려 연합군을 막아내지만 연합군의 공세가 격화하면서 여포군의 전세가 기운다.
이들이 대치했을 여포성의 성벽터에 올라서보았다. 1800년 전 과거 피투성이의 병사들이 아비규환을 이뤘을 전쟁터는 간데 없었다.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허망하게 스러져갔을 수많은 젊은 용사들의 피로 물들었을 땅에는 겨울잡초만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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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곳이 점장대다. 여포는 저 곳에서 장군들의 무예를 평가했으며 병사들의 사열을 받았다. |
수세에 몰린 동탁은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천도를 결정했고, 여포 역시 여포성에서 빠져나와 병사들과 함께 천도길에 오른다. 텅 빈 여포성에 가장 먼저 입성한 반동탁연합군은 유비 관우 장비 3형제였다. 유비 역시 점장대에 올랐을 것이다. 호뢰관에 널부러진 시체와 전쟁으로 황폐해진 폐허를 뒤로한 채 점장대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황하를 내려다봤을 유비. 그는 자신이 훗날 당대의 영웅으로 촉한의 황제에 오를 것을 짐작이라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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