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정치적 맞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55년지기 박 의장과 박 상임고문이 공교롭게도 9일 여의도 정치 퇴장을 동시에 선언했다.
박 의장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과 관련한 책임을 지고 의장직을 사퇴하고, 박 고문은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4ㆍ11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박 의장과 박 의원은 고향과 당적이 달랐을 뿐 서로 맞닿은 인생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날 동반 퇴진의 의미는 남다르다.
경남 남해 출신인 박 의장은 부산고검장까지 올랐고,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박 고문은 순천지청장을 끝으로 검사생활을 마쳤다.
두 사람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나란히 국회에 입성했다. 박 의장은 민주정의당, 박 고문은 평화민주당에 소속돼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여야의 대변인을 맡아 촌철살인의 논평으로 이름을 높였고, 1997년에는 양당의 원내 사령탑인 원내총무를 동시에 맡는 등 정치권의 대표적 논객이자 맞수로 분류됐다.
원내총무 시절인 1997년, 두 사람은 담판을 벌여 당시 대선 후보인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TV토론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박 의장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법무부 장관에 올랐고, 박 고문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
박 의장은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다. 17대 국회 전반기 국회 부의장을 지낸 후 2010년에는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에 올랐다.
박 고문은 세 차례 원내총무를 지낸 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2008년 통합민주당 공동대표 등 당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
시련의 시기도 있었다. 박 의장은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2009년 10ㆍ28 재보선 때 양산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6선에 성공했고 국회의장에 올랐다.
박 고문은 2003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당해나갈 때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을 지켰다. 이듬해 17대 총선에서 낙선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다시 합당해 치른 18대 총선에서 5선 배지를 달았다.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 당내 국회부의장 경선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박 고문은 지난해 펴낸 '한국정치의 민주화도정'이라는 책의 '영원한 맞수'라는 코너에서 박 의장과의 인연을 소개할 정도로 각별한 인연을 표시하기도 했다.
박 고문은 “우린 공격적 맞수가 아닌 협력적 맞수였다”고 회고했고, 박 의장도 “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친구를 위해 봉사했다는 생각이 있어 기분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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