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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사냥터였던 사녹대의 모습. 이 곳에서 조조는 황제를 대신해 환호를 받았고, 이에 분개한 황제는 비밀리에 조조암살을 명한다. |
1800여년전 이 곳은 황제의 사냥터답게 나무가 우거진 낮은 산들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야지대로 변했다. 지금의 사녹대는 그야말로 평탄한 밀밭에 불과하다. 단지 ‘사록대’라고 쓰여진 자그마한 비석만이 이 곳이 황제의 사냥터였음을 짐작케 해 준다. 비석에는 청(淸)나라 건륭(乾隆)황제 12년에 이 곳 위치가 과거 사록대였음이 확인됐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3형제가 조조(曹操)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서기 199년. 하루는 조조가 한헌제와 함께 사록대로 사냥을 나섰다. 이 자리에는 유비 삼형제는 물론 주요 문무대신들이 함께 했다. 큰 사슴 한마리가 뛰어나왔고 헌제가 연달아 세번이나 화살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헌제는 조조에게 쏘아보라고 명했고 조조는 단 한번의 사양도 없이 황제가 내미는 활을 받아들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사슴에 명중했고, 명중한 화살이 황제의 것임을 본 대신들은 “만세,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다. 이 때 조조가 말을 달려나가 황제를 막아서고 대신들의 만세에 손을 들어 화답했다.
조조의 직속 신하들은 계속해서 ‘만세’를 외쳤지만 이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적쟎이 당황한 채 침묵을 지켰다. 조조의 속내는 신하들의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수의 신하들이 침묵을 지켰고, 특히 관우는 분기탱천해 조조를 베어버릴 기세였다. 황궁으로 돌아온 한 헌제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조조에 맞설 길이 없었다. 그날 잠을 못이룬 한헌제는 ‘조조를 주살하라’는 혈서를 작성해 총애하던 후궁인 동(董)귀비의 오빠인 동승(董承)에게 비밀리에 전달한다. 그리고 동승은 조조암살을 계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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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시 신시가지에 있는 귀비원이라는 공원. 이 공원에 삼국지 비운의 여인인 동귀비의 묘가 안치돼 있다. |
사록대를 뒤로한 채 차량에 오른 취재팀은 허창시의 신시가지에 있는 한 공원을 찾았다. 허창시 인민정부 뒷편에 위치해있는 ‘구이페이위안(귀비원, 貴妃苑)’라는 이름의 공원에는 삼국지 비운의 여인인 동귀비의 묘지가 있다.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단지 한 가운데 있는 귀비원에는 허창시민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으며, 예비부부들이 결혼을 앞두고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풍요롭고 행복한 분위기였지만 공원 한 켠의 동귀비묘만은 을씨년스러웠다.
한헌제가 동승에게 혈서를 내린 지 1년후인 200년, 동승은 조조의 주치의인 길평(吉平)과 공모해 조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지만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고 만다. 조조는 동승과 공모자들의 가솔들을 몰살시켰다. 노기가 가라앉지 않은 조조는 칼을 찬 채 황궁에 들어갔다. 조조는 헌제를 찾아가 소매에서 혈서를 꺼내 흔들며 헌제를 추궁했다. 두려움에 몸을 떨며 입을 열지 못하는 헌제를 쏘아보던 조조는 무사들에게 영을 내려 동승의 여동생인 동귀비를 끌어오라고 한다.
동귀비를 죽이려 하는 조조에게 헌제는 매달리듯 “동귀비는 지금 잉태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소. 승상께서는 그 뱃속에 든 것을 보아서라도 동귀비를 불쌍하게 여겨 주시오“라고 당부하지만 조조는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분명 나를 죽이려 할 것이오”라며 동귀비를 참수할 것을 명한다. 체념한 동귀비는 “스스로 목을 메고 죽을 터이니 시신을 보존해 주시고, 특히 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조조에게 말하고는 자결한다. 헌제와 복(伏)황후는 무기력하게 동귀비의 자결을 지켜보며 흐느껴 울 뿐이었다. 조조로서는 자신에 대한 암살사건에 결코 관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약한 여성이며, 그것도 임신 5개월인 후궁의 자결은 세상사람들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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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 시가지의 공원인 귀비원에 위치한 동귀비의 묘지.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앙상히 서있는 묘지위의 나무들이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
동귀비가 묻힌 동귀비묘는 돌담과 함께 울타리가 쳐져 있기는 했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는 듯 보여 보는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특히 겨울철 칼바람에 앙상히 가지만 드러난 나무들이 묘지 위에 자라고 있어 더욱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동귀비가 세상과 이별한 지 14년 후인 214년 동귀비의 자결을 곁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복(伏)황후에게도 불행이 찾아왔다. 복황후는 헌제의 정실부인이자 복완(伏完)의 딸이다. 동귀비의 사망이후 조조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을 키워오던 복황후는 아버지 복완에게 몰래 비밀편지를 보낸다. 복완은 유비와 손권 등의 힘을 빌어 조조를 암살하려고 하지만 이 역시 중간에 비밀이 새어나와 복황후의 음모는 발각되고 만다.
조조는 군사 500명을 동원해 복완과 공모자들의 일가 등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즉결처형한다. 그리고 복황후 역시 교수형에 처했다. 매질을 가해 죽였다는 소문도 있다. 복황후의 두 아들 역시 독살된다. 헌제는 후궁의 죽음에 이어 황후의 죽음까지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눈물로 지켜봐야 했다. 복황후가 사망한 후 조조의 딸 조절(曺節)이 황후(헌목황후, 獻穆皇后)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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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 남쪽 충류촌에 있는 복황후의 묘지. 나무들 뒤로 보이는 언덕이 복황후의 묘지다. |
취재팀은 동귀비묘를 둘러본 후 이어 허창 남쪽 15km가량 떨어진 충류(塚劉)촌 동북쪽에 위치한 복황후의 묘지를 찾았다. 복황후의 묘지는 동귀비의 묘지보다도 더 을씨년스러웠다. 허창시가 1997년 세웠다는 비석은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비석으로부터 10m가량 떨어진 곳에 복황후의 묘가 위치해 있었으며 이 곳은 아예 보존이 돼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초라한 묘지의 모습에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복황후의 불행을 표현한 시가 더욱 애처롭게 다가왔다.
가련제후분리처, (可憐帝后分離處, 불쌍한 황제와 황후의 이별모습이여)
불급민간부여부. (不及民間婦與夫, 처량함이 민간인 부부만도 못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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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황후묘임을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지만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훼손돼 있었다. |
비운의 여인들을 뒤로하고 취재팀은 한나라가 마지막으로 멸망한 곳을 찾아 다시 차에 올랐다. 우리 취재팀 차량은 허창시 서남부 뤄허(漯河)시 린잉(臨潁)현 판청전(繁城鎮)에 위치한 수선대(受禪臺)로 향했다. 수선대는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에게 황위를 양위했던 곳이다. 기원전 206년에 건국된 한나라가 40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서기 220년 멸망하던 마지막 장소가 수선대인 셈이다. 역사적인 장소지만 이 곳 수선대 역시 야산에 불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야산 앞 10m가량 떨어진 위치에 ‘수선대유지(修禪臺遺址)’라고 쓰여진 비석만이 이 곳이 1800년전 수선대가 있었음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유지 옆에는 한창 주택건설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벽돌 둘 곳을 찾지 못한 중국인들은 벽돌을 수선대유지 비석 뒤에 쌓아둔 광경도 눈길을 끌었다. 취재팀은 수선대에 올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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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시 서남부 린잉현에 있는 수선대의 모습. 수선대유지라는 비석 뒤로 보이는 언덕에서 한헌제가 조비에게 황제를 양위했다. |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그 뒤를 승계하던 220년 문무백관들은 헌제에게 양위를 강요했고 어쩔 수 없이 헌제는 양위를 결정한다. 그리고 수선대에 올라 400여명의 대신들과 30만명의 호위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헌제는 옥새를 조비에게 건네주고는 “오호라, 하늘의 역수는 그대 한몸에 있으니 그대는 제위를 사양 말고 천명을 이으라”고 말한다. 옥새를 받아든 조비에게 절을 한 헌제는 변방으로 쫒겨나게 된다. 이 곳 수선대에서 조비를 향해 절을 하던 헌제는 선조들에 대한 죄스러움에, 무기력했던 자신에 대한 회한에, 굴욕스런 삶에 대한 두려움에 눈물을 떨궜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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