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조용성 특파원) 한중수교가 이뤄진 지 1개월 후인 1992년 9월 중국 충칭(重慶)을 출발해 창장(長江)을 타고 웨양(岳陽)까지 가는 유람선에 50여명의 농촌 처녀들이 인솔자를 따라 줄지어 탔다. 베낭을 메고 보따리를 안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행색의 이들은 나무바닥으로 된 선실로 인도돼 쪼그려 앉았다. 선실은 비교적 컸지만 50명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았다. 이들은 저녁에 한 치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채 보따리를 베게삼아 차디찬 나무바닥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당시 이 여객선을 타고 있었던 신영수 베이징저널 발행인은 살짝 열려있는 선실 틈으로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알고 보니 이 처녀들은 웨양에서 내려 열차를 타고 선전(深圳)에 가서 공장직공으로 취업할 예정이었다. 신영수 발행인은 “도시로 돈벌이 나가는 시골처녀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대접조차 하지 않는 정경이 너무도 눈물겨웠다“고 술회했다.
이튿날 중간 경유지에서는 새카만 옷을 입은 건장한 청년 30여명이 인솔자를 따라 승선했다. 역시 선전으로 가는 농민공들이었다. 배에는 이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것 같았다. 갑판 위 여기저기에 앉아있어야 했고 잠도 갑판에서 자야했다. 하지만 이날 밤 갑자기 비가 내리자 그들은 갑판에서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선실복도에 아무렇게나 엎드려 잠을 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목격한 신영수 발행인은 다시 한번 가슴 쓰라림을 느꼈다. 그날 밤 중국인 동행자와 함께 선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신 발행인은 농민공들의 처참한 정경을 생각하고는 하염없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웨양에서 여객선을 갈아타고 난징(南京)에 도착한 신 발행인은 난징창장대교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그의 눈앞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각종 선박들이 새까맣게 창장을 뒤덮은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신 발행인은 ”까마귀 떼가 하늘을 까맣게 뒤덮듯 드넓은 강이 온통 선박으로 뒤덮여 있었다“며 ”중국 경제의 엄청난 역동성과 활력에 순간적으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신 발행인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중국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대해온 신 발행인의 20여년에 걸친 중국 체험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중수교 전인 1991년 경향신문 홍콩특파원으로 부임한 그는 1993년 베이징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7년 말 임기를 마친 신 발행인은 1998년 1월에 서울로 돌아와 논설위원직을 맡았지만 이내 곧 사직하고 베이징의 교민신문인 베이징저널 발행인으로 중국 땅을 다시 밟는다.
베이징저널은 1997년 5월 창간됐다. 당시 베이징의 한국교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지만 교민들에게 중국 사정을 알려주는 교민소식지가 없었다. 이때 신 발행인과 가까운 10여명의 한국인이 교민소식지를 발행하자는데 뜻을 모았다. 약간의 기금도 모았다. 그래서 신 발행인이 편집을 지원하기로 하고 주간 신문을 창간하게 됐던 것이다.
신 발행인은 자신이 귀국하면 그나마 편집을 도와줄 일손이 없어지는 터라 고민 끝에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그만두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저널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는 ”동내 구멍가게야 장사가 안돼 문을 닫으면 그만이겠지만, 하나뿐인 교민지를 없앨 수가 없었다“며 ”베이징 교민들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과 사명감에 다니던 회사를 사직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 이듬해인 1999년 베이징 한국교민사회는 교민회 설립을 준비했다. 당시 중국 민정부는 NGO 설립 법안을 마련해 국무원에 제출하고 그해 12월 발효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재중국한국인회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이 진행됐고 12월 열린 총회에서 재중국한국인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 발행인은 교민사회를 망라한 창립준비위원들의 추대를 받아 초대 회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3년간 재중국한국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초기 타블로이드 8면짜리 신문으로 시작한 베이징저널은 순항을 거듭해 24면짜리 교민지로 발전했다. 하지만 중국당국은 ‘2008 베이징올림픽’을 2년 앞둔 2006년 말 외국 언론에 대한 정돈작업에 나선다. 중국에는 외국인이 자국어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베이징저널은 중국에서 불법간행물로 분류됐다. 중국당국은 베이징저널의 정간을 명한다.
이에 교민사회가 들끓었고, 당시 김하중 주중대사는 중국 당국자를 만나 ”중국은 세계 각지에서 교민신문을 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 외국인의 교민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항의했다. 그후 베이징저널은 중국당국으로부터 “아직 법규가 없어 외국인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못하지만, 발행을 묵인한다”는 구두통보를 받았다. 신문 발행 10년을 넘긴 2007년 8월의 일이었다. 베이징저널은 베이징의 유일한 교민지로서 매주 타블로이드 16면체제로 발행되고 있다. 발행부수는 매주 1만2000부에 달한다.
신 발행인은 특파원 경력을 포함해 22년째 언론계통에 종사하며 중국을 전문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그는 ”교민지 발행에 전적으로 매달리다시피 하느라 정작 내 시간이 없다“면서 ”앞으로 여유를 찾아 그동안 모은 자료와 경험을 책으로 담아내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주요약력 ▲1943년12월 충남 공주 출생 ▲서울 중동고 ▲서울대 중문과 ▲1967년 대한일보 수습기자 ▲1974년 경향신문 기자 ▲1988년 중앙일보 부국장 ▲1991년 경향신문 홍콩특파원 ▲1993년 경향신문 베이징특파원 ▲1998년 베이징저널 발행인 ▲2000년~2002년 재중국한국인회 회장 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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