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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보리밭 사계2- 황금개구리. 순지 5배접, 암채(수정 산호 에머랄드 원석을 정제해 만든 재료)2008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보리를 그리면서 고통스러웠지만 응어리진 마음을 치유받았고 다음 그림을 그릴수 있는 생기를 받았다. 그동안 명상적인 보리밭이었다면, 이젠 마음의 안정과 평화와 행복감을 전할수 있는 보리밭을 그리겠다."
'보리밭 작가'로 유명한 이숙자화백(70)이 5년만에 개인전을 펼친다. 9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숙자의 색채 여정’을 연다.
보리밭이 나오기전인 1970년대부터 보라빛이 일렁이는 '보리밭 사계'등 최근작까지 회화 40여점과 누드 크로키 30여점을 선보인다.
7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화백은 칠순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랜만에 여는 전시를 앞두고 기자들을 만난 그는 격조있고 세련된 이미지가 여전했다. "여자로서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그는 꽂꽂했고 고운 모습이었다. 보리밭에 대한 열정은 더 강해진 듯 했다.
이화백은 "그동안 아홉수를 겪느랴 건강이 약화됐었다"며 "지난해에야 마음의 안정과 건강이 나아져 누드 신작을 그렸다"고 했다.
계속 붓을 잡고 그리는 탓에 인대가 툭 튀어나왔고 오른쪽 팔이 계속 아팠다. 나이탓에 육체도 쇠약해졌다. 하지만 붓을 잡지 않는게 더 힘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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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부터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여는 이숙자 화백이 1989년에 그린 '이브의 보리밭' 앞에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사진=박현주기자 |
◆1980년 시작한 보리밭 "작가 생명 지탱해준 동반자"
한때 '보리밭 작가'라는 타이틀이 싫어 벗어나려고도 했지만 그는 "보리밭은 작가로서 생명을 지탱해준 동반자"라고 했다.
'인대병'도 보리밭이 준 선물이다. 1980년 1월,보리밭은 도전이이었다.
150호 화판에 "내 노력을 시험해보자" 각오로 시작했다. 보리알곡을 만들기위해 연황토 물감을 세필에 묻여 한알한알 모양을 그려나갔다. 이삭한개 30개 정도, 화판에 1500개 이상 이삭이 있으니 4만5000개 이상의 보리알을 그려야 하고 이것을 7,8회 반복해야했다. 보리수염은 보리알의 3배 정도 15만개 가량의 선을 그어야 기본작업이 됐다. 보리알로 우툴두툴 까슬까슬해진 화판에다 손바닥을 문지르며 매일 보리수염을 그렸다. 손바닥이 닳아서 빨갛게 피가 맺혔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런 작업을 몇달간 계속하는 고행하는 자학적인 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몸이 앞뒤로 심하게 흔들려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도 했다. 처음 그려낸 보리. 완성하는 6개월이 걸렸다. 이 작품은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했고, 대상을 받았다.
이후 '보리밭은 운명'이 됐다. '보리작가'별명이 따라붙었다. 84년부터 보리밭과 결별하려고 했다. 황금빛 보리밭에 누런황소를 앉혔다. 88년까지 4년간 '황소'를 그렸지만 미련이 남았다. 보리를 버리지 못하고 '이브'를 결합시켰다. 89년에 등장한 '이브의 보리밭'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보라빛 청맥앞에 체모를 그대로 드러낸 알몸의 이브는 팔을 머리에 올린채 바닥에 누워 눈을 똑바로 뜨고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금기와 억압을 벗어던진 근육질의 여인. 무엇에도 훼방받지 않는 자유로움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당시 누군가는 "보리밭에서 연애해본 경험이 있냐"고 했고 또 화단에서는 "튀려고 한다"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아직도 파격적인 벌거벗은 이브에 모습이라고 하자 그는 "나는 누드를 꽃처럼 나비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화백은 "아마도 무의식이었지만 '벌거벗은 이브'는 내가 살아오면서 갈등했던 여성의 굴레와 인습에 대한 저항의식이 형상화된 내면의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면서 "미련이 남아있던 보리밭을 고뇌의 이브와 함께 그릴수 있다는 기쁨에 열병에 떨 듯 그려낸 그림으로 보리밭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작품세계가 새로 열렸다 "고 말했다.
이 작품은 '채색화가' 천경자화백의 제자로 늘 비교되던 그에게 천화백의 그림자를 걷어낸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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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된 이숙자 화백이 이번 전시에 신작은 보리밭보다는 꽃속의 누드를 그렸다고 말하고 있다. |
◆노년기..편하게 그릴수 있는 누드화에 비중
보리밭은 세계인 누가봐도 공감할수 있는 서정성이 담겼다. 같아보이는 보리지만 계속 변화했다. 초기 알곡과 보리수염에 집중한 이후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줄기로 관심을 쏟았다. 누가봐도 민족의 애환의 정서를 느낄수 있도록 했다면 이제 보리밭은 '명상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시장엔 노란 유채꽃과 보랏빛 엉겅퀴가 함께 있는 청맥 황맥이 물결친다. '풍미작렬'한 맥주 CF한장면을 보는 듯하다.
"거대한 바위산을 연약한 두손에 곡괭이를 잡고 끊임없이 파헤쳐나가야 할 것 같은 사명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화가"라고 여겼던 그는 이제 세월에 순응하기로 했다.
노년기의 체력의 한계로 보리밭을 계속 그릴수 있을지 몇점이나 더 그릴수 있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지난 1년간 그린 작품은 5점 정도라고 했다.
건강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그는 이제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잘 그릴 수 있는 누드화 작업에 비중을 더 두기로 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도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드러누운 이국적인 여성의 누드화 ‘이브-봄 축제’ 시리즈 등이다.
“생명력이 넘치는 눈부신 꽃 속의 이브를 그리면서 제가 활력을 얻듯이 보는 분들도 그 생명력을 느끼고 생기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을 계속할 겁니다.”전시는 4월1일까지.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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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화백 자화상. 즐거운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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