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추억에 빠져도 좋고 그때 그 시절 여행지의 감동을 찾아 흑백사진 속 그곳을 직접 찾아가보는 것도 좋겠지요.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어떤이에게는 동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과거로의 여행지로 떠나볼까요
![]() |
소풍길의 단골 메뉴는 사이다와 김밥입니다.가족들이 소풍나온 길에도 김밥이 빠지지 않습니다. |
◆ 김밥 한 줄 사이다 한개 소박한 소풍의 추억
지방에 사는 아이들이야 고장의 명소를 찾았겠지만 1960~70년대 서울 아이들의 소풍장소로는 창경궁이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창경궁에는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이 모두 모여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이 있고, 식물원과 케이블카 공중열차까지 있었으니까요. 당시만해도 변변한 위락시설이 없었던 지라 창경궁으로 소풍간다고 하면 아이들의 입은 금방 함지박만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평일에는 인근 학교는 물론 서울 외곽의 학교까지 소풍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죠. 사실 창경궁은 아이들의 소풍장소로만 유명했던 것은 아닙니다. 창경궁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너무 아름다워 벚꽃 놀이하면 으례 꼽히는 곳이 창경궁이기도 했습니다.
7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도 창경궁은 잊지 못할 명소였습니다. 밤마다 벌이는 ‘나체팅’때문이었죠. 나체로 미팅을 하냐고요? 큰일날 소리죠. 밤(나이트)에 벚꽃(체리블라섬)나무 아래서 미팅을 한다해서 만들어낸 당시의 신조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창경궁은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입장권을 먼저 사려는 사람들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고, 소풍온 아이들은 사람들에 밀려 동물원근처에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습니다. 사실 창경궁은 아픈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창경궁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1909년 일제 통감부가 우리의 국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왕궁을 허물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한 것입니다. 왕궁을 한낱 놀이공원으로 만든겁니다. 일제의 의도야 괘씸하지만 가난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에게 추억과 위안을 주었으니 그나마 제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요? 이후 창경궁의 놀이시설은 철거되고 동물들은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이사하면서 존엄한 왕궁의 못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 |
기차를 타고 떠나는 단발머리 여학생들의 수학여행길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
◆ 수학여행 그 순수했던 시절로의 회귀
70년 대부터 80년대 까지 수학 여행지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경주였습니다. 까까머리 남학생도 단발머리 여학생도 경주에만 오면 철부지 아이가 됩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겉핧기 식으로 보고 어떻게 하면 수학여행을 즐겁게 지낼까 즐거운 상상을 합니다. 아니 야외에 나온 김에 일탈을 하고 싶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다보니 중학교때도 고등학교때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도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단단한 돌을 다듬어 유려하게 만든 세계적인 유적 석굴암의 가치를 당시에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천년고찰 불국사는 그저 그런 사찰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수학여행이 시작되는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보니 숙소가 모자라 다방과 식당에서 밤을 새우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방 하나에 10여명씩 자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야말로 새우잠을 자면서도 학생들은 행복해 했습니다.
![]() |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최고의 피서지입니다 |
◆예나 지금이 변함없는 바캉스 문화
추억여행지 중에 크게 변하지 않는 곳이 피서지입니다. 70~80년대 사람들이 즐겨찾던 피서지는 설악산 낙산 해운대 등 이였습니다. 지금도 피서철이면 강원도로 몰려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데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설악산은 최고의 피서지였습니다. 시원한 계곡이 있고 관동8경중에 하나인 낙산사를 품고 있는데다 백사장이 빼어난 낙산해수욕장까지 인근에 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겠지요. 설악산은 사시사철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었습니다.
피서철 뿐 아니라 단풍놀이 명소로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였으니까요. 70년대 초반에는 설악산으로 가는 길이 꽤나 험난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7시간이나 걸리니 피서를 가는 것인지 고생을 하러 가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1975년 서울에서 삼척을 잇는 영동․동해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가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해운대도 예나 지금이나 즐겨찾는 피서지입니다. 80년대에는 무려 100만명이 해운대를 찾기도 했습니다. 70년대 조금 특이한 피서지라고 하면 뚝섬과광나라 일대입니다. 요즘에 야외수영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예전에는 일대가 유원지여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한강에서 중금속에 오염된 기형어가 잡히면서 뚝섬과 광나라 유원지는 서리를 맞았습니다. 물론 손님도 끊기고 뚝섬에서 수영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시민들의 새로운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 |
최고의 신혼여행지는 역시 제주도 였습니다. 그 시절 신랑신부들은 제주도에서 푸른 밤을 꿈꾸었습니다. |
◆ 달콤한 결혼의 시작 신혼여행지
요즘에는 신혼여행지하면 하와이나 괌 몰디브 같은 해외를 떠올리지만 예전에는 제주도가 가장 각광받는 신혼 여행지였습니다. 물론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이 1989년의 일이었으니 그 이전에 해외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겠지요. 제주도로 가는 여행경비는 평균 10만 원 선이었습니다. 온양온천으로 가는 경비에 비해 5배나 비싼 가격입니다.
김포공항청사는 주말이면 신혼여행객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항공사는 정기 여객기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특별기를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성산일출봉이나 천제연 폭포 같은 제주의 명승지에는 거의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는 신혼여행객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합니다. 렌트 카가 없던 시절이니 대절택시 기사가 관광안내원이자 사진 기사였습니다.
이후 신혼여행 일 번지였던 제주는 해외여행지에 자리를 내놓았지만 대신 그 자리에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이 한해에도 수 백 만명씩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온양온천은 60~70년대 으뜸 신혼여행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1971년 기준 2박 3일 일정에 드는 비용이 숙박비와 교통비 식비를 모두 합쳐 2만원 선입니다. 당시 워커힐 호텔 1박요금이 2만원이었으니 요즘 돈 가치로 20~30만원 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비용이나 거리면에서 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다양한 휴양시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장거리 신혼여행객이 늘기 시작하면서 온양온천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2008년 수도권과 연결된 온양온천역이 개통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한 시절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같이 안고 가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주에는 추억을 찾아 가까운 근교라도 나가보세요. 그곳에서 추억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