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현 전 대사는 당시 출입기자단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외교 기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부 유력매체들은 한·중수교가 추진되고 있는 낌새를 채고 당국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아슬아슬한’ 줄타기였지만 결국 국내 언론을 상대로 보안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권 대사에 따르면 당시 베테랑 기자들만 모인다는 외교부 기자실에선 기자들에 의해 모든 외교기밀이 다 깨져서 나왔고, 그로 인해 좌천당하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하는 외교관도 있었다며 당시 수교 움직임은 느낄 수 있으나 단서를 못 잡아내 속탄 기자만 해도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출입기자들의 반란은 대단했다. 특종을 낙종했으니까 집단적 반란은 당연한 것이었다.
1992년 8월17일, 정부는 한·중수교 사실을 맨 먼저 대만에 알린다. 한국을 비난하는 대만 내부의 움직임이 나오면서 대만 발 외신으로 관련 내용이 하나둘 나오게 된다.
외교부 출입기자가 낙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당시 대변인이었던 유명환 전 장관은 당시 보도와 관련 '무조건 부인하라'는 장관의 지시를 받고 끝까지 한·중수교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만 한다.
사실관계 확인이 안됐던 기자들은 각사 데스크에게 '아니다'라는 정부의 입장을 보고하고, 물론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기사도 쓰지 못한다.
그 후 대만에 이어 미국과 일본에도 사전 귀띔을 해주면서 일본에서도 관련 보도가 속속나온다.
일본은 엠바고(일정 보도시점까지 보도금지)를 깰 수 없어 베이징발 외신으로 한중수교 사실을 보도화 한다.
잇따른 외신보도로 한국 언론사는 초비상 사태에 돌입, 데스크에게 면목없는 외교부 출입기자들은 집단으로 장관실을 점령(?)한다.
사건이 터지고 장관 호출을 받고 달려간 권 대사는 " 장관 얼굴이 뿌옇게 떠 있었다"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며 당시의 웃지못할 상황을 설명했다.
결국 외교부를 출입하는 40명의 기자들과 수교 협상팀 등은 한·중수교 하루 전날인 23일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한국 역사상 서울발 첫 베이징행 비행기였다. 마흔명이나 되는 기자들과 동행하는 것도 이례적이었다.
권 대사는 "당시 청와대는 한·중수교 취재를 위해 동행할 기자수를 4명으로 확정 지은 뒤였다"며 "청와대 지시도 중요했지만 우선 역사적 수교사실부터 기록·보도하게 해놓고 청와대는 나중에 수습하자고 장관에게 건의했다"고 말했다.
세기의 특종을 낙종 맞은 기자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해준 대목이다.
그 후 장관은 직접 전화기를 든다. 각 신문사의 주필, 편집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시점을 전하고 한중수교 임박사실을 알려 보도 방향을 잡는데 협조를 구한다.
권 대사는 특종을 쫒는 하이에나의 눈을 가진 기자들과의 일화를 끝으로 기자에게 한마디 했다.
"그래도 기자들은 해피(Happy)했죠. 실컷 기사를 썼으니까요. 전세계 톱 뉴스를 썼고 세계 각국 언론사들이 우리 기자들의 기사를 받아 썼잖아요. 한풀이 한 것 아니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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