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웨이하이> 3-1.애국교육 1번지 류궁다오

아주경제 김효인 기자=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에도 불구하고 웨이하이(威海) 해변 하이빈베이루(海邊北路) 선착장에는 류궁다오(劉公島)로 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배를 타기 위해 가는 길 도중에는 류궁다오 인근 관광지를 안내하는 간판이 모두 한국어로 적혀져 있어 중국어를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현지 안내원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류궁다오를 애국교육기지로 지정한 이후 청소년들을 비롯한 국내 관광객들과 후진타오((胡錦濤)주석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며 “특히 방학을 맞아 최근 댜오위다오와 관련된 문제로 인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 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대폭 증가했다”고 강조했다.

류궁다오는 동서로는 4.8km, 남북으로는 1.5km에 이르는 섬으로 100여년 전, 청일전쟁 당시 북양함대가 마지막까지 일본에게 저항하다가 패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된 아픈 역사를 가진 곳이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인 동시에 사슴, 팬더를 구경할 수 있는 생태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중국에서 청일전쟁은 갑오(甲午)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오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배를 타고 20여분간 류궁다오로 향하는 동안 내부에서는 청일전쟁과 관련된 영상이 TV를 통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득 류궁다오란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유래가 궁금해져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그는 “동한시대 말기 황건적의 난으로 피신한 동한의 왕, 유(劉)씨 일가가 이 곳에 정착하면서 주민들에게 존경받았기에 그의 이름을 따 ‘류궁다오’라고 불리게 됐다” 라고 설명했다.

배가 어느새 류궁다오 선착장에 도착하니 별 다섯개가 새겨진 건물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이어 돌로된 큰 간판에는 ‘류궁다오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란 한글이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안내원은 “류궁다오는 웨이하이에서 5A급 관광지로 국가가 지정한 애국교육기지이기도 하다”며 “특히 최근 방학기간을 맞아 이 곳을 찾은 청소년 관광객들이 가장 많으며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종종 이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갑오전쟁 박물관으로 가던 도중 해군 캠프 활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이곳에는 실제 해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방학기간동안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군캠프를 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검게 그을린 아이들은 힘든 기색 없이 류궁다오에서 즐거운 해군캠프 활동을 보내고 있었다.

류궁다오에서 처음으로 우리를 반긴 것은 청일전쟁 11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중화하이탄(中華海壇)이라 불리는 거대한 탑이였다. 하부에는 중국 56개의 소수민족을 대표하여 56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높이는 16.8m 에 이른다.베이징 디탄(地壇), 텐탄(天壇)에 이어 웨이하이에 세워진 중화하이탄탑은 그만큼 이 곳이 바다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일깨워주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중화하이탄을 거쳐 류궁다오의 갑오전쟁 박물관으로 향했다. 대항해 시대를 연상케 하는 망원경으로 바닷가를 바라보는 조각상이 맑은 하늘 날씨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이 곳에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할 겸 취재진은 갑오전쟁 박물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갑오전쟁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니 전쟁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밀랍인형상들과 전쟁 당시 쓰였던 무기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중간중간에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는 대형 스크린 영상을 통해 설명하면서 자칫 지루하기 쉬운 박물관 투어를 흥미있게 만들었다.

전시물 중에는 병사도 아닌 한 평범한 한 가족이 우물로 뛰어들고 있는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안내원은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한 가족이 일본인들에게 멸시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모두 우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고 소개했다. 절개를 지킨 이야기를 높이 평가해 이같이 조각상으로 전시해 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아시아 최강으로 불리던 북양해군은 어째서 일본에게 패했던 것일까? 안내원은 “북양함대는 이홍장(李鴻章)의 지휘 아래 1888년 건설됐으며 청일전쟁 직전엔 철갑선을 포함해 29척의 함정을 보유했습니다.당시 아시아 최강, 세계 4위란 평가도 있었지만 서태후가 자금을 빼돌려 이화원을 지으면서 포탄을 살 자금이 부족하여 당시 치원(致遠)함을 지휘하던 청나라 해군은 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음에도 자신의 안위만을 챙긴 서태후로 인해 일본에게 8년, 영국에게 23년동안의 통치를 받게 됐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이런 뼈아픈 역사적 경험 때문일까. 지금 중국은 정치인들의 부패를 매우 강력히 다스리고 있으며, 최근에는 남극탐험, 항공모함 개발 등 해양강국을 향한 노력에 가일층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청일전쟁박물관을 나와 ‘영국조차지 웨이하이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하며 일본을 비롯한 서양열강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웨이하이는 영국으로부터 32년, 류궁다오는 42년간 조차지로 전락하게 된다. 박물관 입구에는 영국의 지배를 받던 웨이하이의 국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영국 국가 문장 옆에 조그맣게 그려진 새 한마리가 웨이하이를 상징하는 듯 하다. 특히 이 곳 박물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골프를 치는 소년이 있는 조각상이다. 웨이하이가 골프·레저의 도시로 유명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과거 영국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류궁다오에서 다시 웨이하이의 선착장으로 향하다 보니 바닷가 위에는 햇살과 함께 바다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돌아가는 배 안의 중국인들의 표정에는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웃음이 사라지고 왠지 착찹한 표정이 역력했다. 청일전쟁은 비록 과거의 일이 돼 버렸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또다시 댜오위다오(釣魚島列島)를 중심으로 갈등이 빚어지면서 이 곳 류궁다오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심어주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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