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공산당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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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10-23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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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의 기적을 일군 신생 정치집단-상

유재현 전북대 교수(전 칭다오 총영사)

중국 재직시 중국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누군가 열창 한 노래가 있었다. 제목은 ‘沒有共産黨, 沒有新中國’, 즉 ‘공산당이 없었다면, 지금의 신중국도 없었을 것이다’는 의미의 노래로 중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가요다. 이노래를 들은 뒤 중국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됐다. 정말 공산당이 없었더라면 중국이 지금 같은 경제 기적을 이루며 국제무대에서 부상(浮上)하지 못하였을까? 중국 공산당의 일당 장기집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11월 향후 10년 중국을 이끌 공산당 지도부 개편을 앞두고 세계의 관심이 중국을 향해 쏠려 있다. 중국공산당 영도하의 현 중국의 국제위상을 살펴보고, 중국공산당 장기집정의 힘과 비결, 앞으로의 전망을 가늠해 본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의 국제위상

중국공산당은 1978년 개혁 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한 이후 지난 30년간 세계 제일의 인구대국을 이끌며 연평균 10%에 달하는 고도성장을 구가하여 왔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로 중국은 2010년 말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G2)의 반열에 올라섰다.
중국은 작년 말 현재 GDP 7조2900억 달러에 세계 수출1위국(1조8900억 달러), 외환보유고 세계1위국(3조2100억 달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자동차, 휴대폰, TV 등 주요 공산품의 생산, 판매 방면에서 세계 선두 자리를 점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자동차와 가전 시장에서도 이미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시장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2000년대 이래 ‘저우추취(走出去:해외진출)’ 전략에 따라 세계 각국으로 활발히 뻗어 나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해외직접투자(FDI)와 공적개발원조(ODA)를 확대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 국채의 1조 달러 이상을 매입하여 미국 정부의 재정을 지탱시켜 주는 최대 채권국이 되고 있다.

한편 중국은 2003년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인 선저우5호의 발사 성공 후 지속적으로 우주 개발에 노력하여 지난 6월에는 선저우9호 유인 도킹에 성공함으로써 우주정거장 시대를 열고 세계 3대 우주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군사 분야에서도 2008년 이래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으며, 둥펑(東風) 등 신형 미사일 개발과 바랴그(Varyag) 항모 건조 등 장거리투사 무기체계 개발을 서둘러 군사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일각에서는 2016년에서 2020년 사이에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규모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로인해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역할과 발언권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 주요 국제기구의 고위직에도 자국인을 다수 포진 시킴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개혁‧개방 정책의 추진이래 ‘평화로운 주변환경의 확보’를 대외정책의 최우선목표로 삼고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의 외교 전략에 따라 국제사회로부터 배우는데 중점을 두어왔던 중국은 2003년 이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적으로 솟아오름)’와 ‘유소작위(有所作爲: 필요시 참여와 개입)’를 수시로 거론하고, 동시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외치며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2004년 제기된 중국식 발전모델인 ‘베이징컨센서스(Beijing Consensus)’가 지속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중국공산당 장수의 비결-변화와 변신
중국공산당의 역사는 끝없는 변화과 혁신의 역사이다. 중국공산당이 창당 이래 90여년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온 가장 큰 요인의 하나는 그들이 시대 흐름에 맞춰 유효한 전략적 변신을 거듭해 왔고 이를 통해 정치 안정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은 도시지역의 노동자 대신 농민 중심의 당을 건설하여 농촌을 통해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적 혁신을 통해 대륙에서의 정권 창출에 성공하였다. 마오(毛)는 정권장악 후 사회주의 경제 개조에 착수하여 정권의 공고화를 도모하였으나 1960년대 초반 대약진운동에 실패, 경제와 민생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무렵 덩샤오핑(鄧小平)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描論)’을 설파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마오(毛)가 사망한 후 덩샤오핑 주도로 1978년이후 체제개혁과 대외개방이 단행된다. 혁명 대신에 발전이 당면과제로 제기 되었고, 사상 대신에 실천이 진리를 판단하는 최선의 기준이 되었다. 이후 중국은 경제 사회적으로 혁명적 변화를 맞게 된다.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대회시 덩샤오핑은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의 구체적 현실을 결합하여 중국의 특성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요지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였고, 이어 1984년 제12기 3중전회(三中全會)에서는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통해 ‘계획적 상품경제론’을 제시하였다.

1885년 덩샤오핑은 한걸음 더 나아가 “능력이 있는 자가 먼저 부자가 되라 ”는 소위 ‘선부론(先富論)’을 제기하였는데, 이 주장은 빠른 경제 발전을 위해 평등주의를 타파하고 실용주의와 성장정책을 우선시하는 구호가 됐다. 1980년대 말 과열과 고물가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이 비판의 표적이 됐다. 1992년초 덩샤오핑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생산력 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유리하다면 자본주의적인 것까지 모두 받아 들여야 한다”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설파하였다. 이로인해 뒤뚱거리던 개혁개방은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의 정책을 이어 받은 장쩌민(江澤民)은 2000년 2월 광둥성을 시찰하며 ‘3개대표이론(三個代表理論)’을 제시하였다. 공산당이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광범위한 인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뜻이다. 당이 대표해야 할 계급이 노동자•농민에서 기업인•자본가•지식인 등으로 확대되었다. 글로벌시대에 적응하려는 공산당의 자기 변신의 표현으로 평가 된다.
한편 2002년 장쩌민을 이은 후진타오(胡錦濤)는 유가의 이념인 ‘화해(和諧 조화)’사회를 정치구호로 내세워 왔고, ‘과학적 발전관’을 새로운 발전 전략으로 제시했다. ‘과학적 발전관’은 ‘인간중심’ 균형, 지속가능 발전 등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과거‘선부론’에 입각한 성장우선 정책이 '사회주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변화의 전략인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이론적 실천적 변화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상황에 맞춰 적응시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처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거쳐 현재에 이르면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에서 중국특색의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를 운용하는 정당으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장수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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