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1, 시중쉰의 아들 시진핑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 : 1913~2002)의 장남으로 1953년 산시(陝西)성 푸핑(富平)에서 태어났다. 인민해방군 서북방면군을 이끌고 공산당 혁명에 참가했던 시중쉰은 시진핑이 6세였을 때 국무원부총리에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후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집안이 풍비박산났고 그는 산시성으로 하방되어 7년동안 농촌에서 기층생활을 경험한다. 문혁이 종결되자 그는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비서로서 사회 첫발을 내딛는다. 3년후 중앙에서의 편한 직장생활을 뿌리치고 기층에 투신해 지방관료의 길을 걸으며 미래를 준비했다.
1985년부터 2002년까지 푸젠성에서 근무했으며 푸젠성에서 성장까지 올라섰다. 이후 저장성 서기로 자리를 옮겨 개혁개방시대 중국 연안지역의 고속성장에 일조한다. 2006년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서기가 비리혐의로 낙마했고, 마땅한 후임자를 찾지 못한 중공중앙은 상하이 서기직을 반년이상 공석으로 놔둬야 했다. 그리고 2007년 상하이시 서기에 시진핑이 전격 낙점되면서 전국적인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열린 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서열6위의 상무위원으로 발탁되며 후계자 자리를 예약했다. 부인은 유명한 민족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 1962)이며 슬하에 한명의 딸이 있다.
◆서열2, 공청단파 핵심인사 리커창
리커창(李克强)은 1955년 7월 안후이(安徽)성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났다. 문혁이 종결되고 대학입시가 부활하던 해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졸업후 베이징대 동기생들처럼 미국유학을 준비했었지만 미래를 위해 정치에 투신하기로 마음먹고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에 취임했다.
이후 198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로 자리를 옮겼고 이 곳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199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오르며 촉망받는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1998년 허난성 성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2004년 랴오닝성 서기로 부임했다. 랴오닝에서 서민주택개선사업을 펼쳐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명실상부 후진타오 주석의 후계자로 기세를 올렸지만 2007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에게 고배를 마시고 만다.
당시 시진핑에 이은 서열7위의 상무위원으로 발탁됐고 이듬해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올랐다. 상무부총리에 오른 후에도 보장성주택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치는 추진력을 보여줬다.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총리에 취임해 10년동안 중국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부인은 경제무역대학 영문과의 청훙(程虹, 1957)교수이며 슬하에 1녀가 있다.
◆서열3, 장쩌민 주석의 최측근 장더장
1946년 11월 랴오닝(遼寧)성 타이안(台安)에서 태어난 장더장(張德江)은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으로 활동하다가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현의 농장으로 하방됐다. 옌볜대 조선어과에서 학업을 이어가다가 1978년 8월엔 교환 유학생으로 뽑혀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2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때문에 한국어에 능통하며 북한 사정에 밝다. 김정일이 생전 중국을 방문했을때 그가 직접 수행하기도 했었다.
1986년 국무원 민정부에서 근무했었고 1990년부터는 지린성에서 일했다. 한중수교 이후 북한관계가 소원해지자 장쩌민 주석이 지린성 국경지대를 시찰했을때 그를 수행하며 신임을 얻었다. 이후 그는 장쩌민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저장성서기, 광둥성 서기를 지냈다. 지난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올라선 이후 2007년에도 연임했다. 아직도 장쩌민 전 주석을 자주 만나며 깊은 신뢰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열4, 태자당 대표주자 위정성
위정성(俞正聲)은 1945년 4월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황징(黃敬, 본명 유치웨이, 俞啟威)은 혁명원로로서 톈진(天津)시 시장을 지냈다. 그의 가족은 증국번(曾國藩),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과 혈연 지연으로 얽혀 있어 중국 최고의 명문가로 꼽힌다.
대표적인 태자당인 위정성은 공산당 고급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 81소학교와 베이징 제4중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에 진학했다. 문혁당시 갖은 고초를 당했으며 문혁 이후 국무원 기계공업부에서 근무했다.
그의 형인 위창성(俞昌聲)은 국가안전부에서 근무하다가 1985년 돌연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는 그의 커리어에 약점으로 작용했지만 원로들의 지원에 힘입어 결국 상무위원 진입에 성공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칭다오에서 근무하며 이 지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기업을 유치해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2001년 후베이성 서기로 근무했으며 2007년 시진핑의 후임으로 상하이시 서기로 일해왔다.
◆서열5, 선전분야의 최고경지 류윈산
류윈산(劉雲山)은 1947년 네이멍구(內蒙古) 투모터(土默特)유기(右旗)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고향인 조적은 산시(山西)성 신저우(忻州)다. 1969년 투모터의 타자원으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었다. 타자원으로 일을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그는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통신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4년 그보다 4살 위인 톈충밍(田聰明, 전 신화사 사장) 당시 신화통신 기자의 지원을 받아 신화사 기자로 채용됐다.
톈충밍의 지원하에 그는 네이멍구에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톈충밍이 티벳으로 옮겨 후진타오주석과 함께 근무하며 신뢰를 얻은 이후 류윈산의 정치인생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때문에 류윈산은 공청단파로 분류된다. 1993년 네이멍구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와 당 중앙선전부 부부장에 오른다. 2002년부터는 중앙선전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서열6, 혁명원로의 사위, 경제통 왕치산
왕치산(王岐山)은 1948년 산둥성 칭다오에서 평범한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왕치산은 문혁이 발발하자 오지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하방됐다. 이 곳에서 혁명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딸인 야오밍산(姚明珊)과 교제하게 되고 결혼까지 이어진다. 이 때부터 그의 인생은 달라지게 된다.
1973년 시안(西安) 시베이(西北)대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한 만큼 역사에 대해 해박하다. 1980년 부총리였던 장인의 영향으로 경제분야로 방향을 틀고 이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다가 1988년 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기용되면서 금융계에 발을 담근다.
이후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신임을 얻어 중국인민은행 부행장, 중국건설은행 행장에 오른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의 여파로 광둥성의 금융분야가 불안해지자 중공중앙은 그를 광둥성으로 급파해 위기를 해소토록 했다. 2002년 부동산거품이 문제되던 하이난성의 서기로 파견됐다. 2003년 사스가 창궐한 베이징시에 시장으로 투입되며 그는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는다. 2007년 정치국위원에 올라섰으며 국무원 부총리로 활약했다.
◆서열7, 행정의 달인 장가오리
장가오리(張高麗)는 1946년 11월 푸젠(福建)성 진장(晉江)시의 시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극빈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학업성적은 빼어났다. 샤먼(廈門)대학 경제과를 나왔으며 1970년 8월 졸업한 후 석유부 광둥 마오밍(茂名) 석유공사에 운반공으로 입사했다. 매일 주어지는 임무는 시멘트 운반이었다. 하지만 열정과 능력을 인정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후 광둥성 경제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정통관료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1997년 선전시 서기에 취임해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했다. 선전시 서기로 4년을 근무하며 눈부신 경제개발을 이뤄냈고 이를 기반으로 2001년 산둥성 서기에 발탁됐다. 2007년에는 톈진시 서기로 보임됐으며 정치국위원에 올랐다. 워커홀릭이며 빼어난 행정능력이 강점이다. 석유업계 출신인 쩡칭훙(曾慶紅) 전 부주석의 지원을 얻고 있으며, 이를 매개로 장쩌민 주석까지 연결돼 있다. 내년 3월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올라 중국경제를 이끌어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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