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광주·서울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육군 소장이던 부친이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그는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63년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그는 "아이들이 특권의식을 갖게 될까 걱정된다"는 어머니 육영수의 뜻에 따라 부모와 함께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가지 않고 서울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1964년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이때부터 약 18년간 청와대에서 지냈다.
열두 살부터 지낸 청와대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부모님의 국정운영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국가운영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이후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서 공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 시절 늦은 밤까지 공부와 실험에 빠져 살며 미팅 한 번 못해본 공대생이었다고 자신을 회고한다.
대학 졸업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그르노블대학에서 수학했다.
그의 인생에서 첫 굴곡은 1974년 어머니가 흉탄에 맞아 절명했을 때였다. 프랑스에서 유학생활 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재일동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비행기 시간에 늦어 급하게 떠나는 자동차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후 5년간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다. 그때 나이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당시 그의 일기에는 퍼스트레이디로 살 수밖에 없었던 고뇌가 배어 있다. "책임.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1974년 9월 16일)",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1974년 11월 10일)."
스물일곱 살이던 1979년 10월 26일 총탄에 아버지마저 잃게 되자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피묻은 옷을 빨면서 그는 "남들이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했다.
청와대를 나온 후 부모님에 대한 거친 오해와 비판이 계속되는 차가운 현실에 맞서야 했다.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도 하루 아침에 등을 돌렸다. 그는 20여년 세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동안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고 사색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며 "비범하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것부터가 험난한 내 인생길을 예고해주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20여년 칩거생활 동안 부모님 추모사업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병원과 장학사업을 하는 등 사회사업에 매진했다.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했고, 1987년에는 아버지의 추도식을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에서 열었다. 1988년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고, 1989년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했다. 이어 1990년에는 아버지의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 출간, 영화 <조국의 등불> 제작 등 90년대 초반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의 재평가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997년 12월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정치입문을 결심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인의 길을 운명이자 소명이라고 술회했다.
"운명은 항상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가야만 할 길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몰아넣는다. 여태까지 그래왔다. 지금도 예외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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