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4월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16대, 17대, 18대 국회를 거쳐,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제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에서 탈당해 한때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으나 대선 전에 복당했다.
2002년 5월 12일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으로 존폐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의 대표를 맡아 천안 연수원 국가 헌납 등의 조치를 취하고 대대적 물갈이를 단행했다. 재·보선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그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잠재적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사학법 직권상정 처리에 반대하며 장외투쟁에 나섰고, 이후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냈다.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해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으나, 그 와중에도 "대전은요?"라며 당원들에게 선거 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여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듬해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당시 서울시장을 지낸 이명박 후보에게 석패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박근혜 계열의 인사들이 대거 탈락되면서 친이-친박간 갈등이 고조됐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계열의 정치인들이 대거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가 2012년 19대 총선 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 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용산참사 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했고, 한나라당에 의한 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 이명박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2010년 8월 22일 11개월 만에 이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국정 동반자로 협력을 약속했다.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폐기되며 원안이 통과되자 친박-친이계와의 갈등은 잠시 가라앉았다. 2011년 12월 9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을 못 이기고 사퇴하자, 한나라당은 전 대표인 박근혜를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박 당선인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지 두 달 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당을 공식 출범시켰다. 제19대 총선을 22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장에 추대된 박 당선자는 4월 총선에서 152석을 획득, 원내 1당을 유지했다.
이어 8월 20일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2002년 한나라당 16대 대선후보 경선 출마선언 후 대권 도전 3수 만에 당내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출마선언에서 "국민 한 분 한 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초박빙 접전을 벌인 끝에 12월 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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