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1월 아주중국> 이철성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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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1-0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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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江湖(강호)사회’를 돌아본다

글 이철성 한국은행 전 베이징 사무소 소장 전 JP모건 고문

‘江湖’(강호)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연상될까? 무협지를 많이 본 사람들은 ‘무림강호’를 떠올릴 것이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와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시를 떠 올리기도 할 것이다. ‘강호제현’(江湖諸賢)의 질정을 바란다’라는 책 서문의 표현도 생각날 것 같다.

중국에서 강호라는 단어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인다. ‘장자’(莊子)의 外篇-天運篇에 ‘샘물이 마른 후 물고기가 서로 습기와 입거품으로 의지하여 사는 것보다는 강호에서 서로를 잊고 사는 게 낫다’(泉涸 魚相與處於陸 相以濕 相濡以沫 不若相忘於江湖) 라는 공자와 노자의 대화내용이 있는데 여기서의 강호는 자연의 강과 호수를 지칭한다. 속 뜻은 속세의 먼지 같은 삶을 걷어내고 자연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범려가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운 후에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로 나갔다(乃乘扁舟, 浮江湖)’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의 강호도 대자연을 뜻한다. 그래서 범려가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대자연 속으로 은둔하였다는 표현이 된다. 범려는 나중에 도(陶)라는 곳으로 가서 장사를 해 큰 부자가 되었으며 도주공(陶朱公)*이라 자칭하였다.

여담이지만 그는 장사로 번 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씀으로써 후대의 존경을 받는 상인이 되었는데 지금도 베이징, 선양 등지에는 그에 대한 존경을 뜻을 담아 이름 붙인 ‘도주공관’(陶朱公館)이란 식당들이 있다. 베이징 도주공관은 상호의 뜻이 좋아 서울에서 오는 귀한 손님을 모시고 필자도 자주 찾곤 했다.

삼국지의 조조(曹操)는 “강호가 깨끗치 아니하여 지위를 물려줄 수 없다”(江湖未靜,不可讓位)라는 말을 하였는데 여기서의 강호란 천하(天下) 또는 인간사는 세상을 뜻한다. 또 송나라 때부터는 강호가 유랑인(游民)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중국의 《漢語大词典》(商務印書館, 韓語大詞典出版社,2002)을 보면 강호의 의미가 1. 강과 호수, 2. 사방 각지, 3. 민간, 4. 은둔자의 거처, 5, 퇴직하여 은거하는 상태, 6 각처를 유랑하며 곡예를 하거나 약을 팔고 점괘 등을 보며 생계를 유지하는 자 또는 그들의 사회 등 참으로 다양하게 쓰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머릿속에 보편적으로 떠 오르는 ‘강호’의 의미는 위 정의중 6번 항목(유랑인 또는 그들의 사회)과 가장 어울릴 것 같다. 이러한 의미의 강호사회는 19세기 초부터 본격 도래하였는데 그 사회적 배경을 조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양(于陽)이란 사람이 쓴 ‘강호중국’(江湖中國)이란 책 내용을 근거로 해 보자.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국가이면서 유교국가였다. 농경사회는 가족촌락 단위로 집단거주를 하며 인구의 이동성이 극히 제한되는 사회이다. 유교사회는 대가족주의를 신봉하고 기술혁신을 배척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인구증가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먹고 생활할 거리를 찾아 외지로 떠나는 유동인구(유랑인)의 증가가 초래된다.

유동인구의 증가현상은 이미 16세기 전후 명나라 중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한 19세 기초 청나라 건륭제 퇴위시기 이후 극심해진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생겨난 유랑인들을 정상적인 정부 기능이나 사회조직이 흡수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해 지자 각양 각색의 비밀결사조직, 동업자조직, 종교조직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 조직사이에서 통하는그들만의 규칙(潛規則)이 기존 질서를 점차 대체해 가면서 국가권력이나 정상적인 규범이 작동되지 않는 영역이 늘어난다.

이러한 현상이 소위 ‘강호화’이고 이러한 현상이 지배하는 사회가 ‘강호사회’이다. 다시 말해 강호사회는 정부조직 이외의 조직이 권력을 형성하고, 비정상적인 규칙이 정상적인 규칙을 대체하고 지배하는 사회이다.

20세기 초 청조 말기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시까지는 강호사회가 전통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중국의 주도적 사회구조로 등극한다. 그 부작용도 심했지만 강호조직은 정부가 상실한 사회 통제능력을 보충해 주는 순기능도 일정부분 담당하였다. 그래서 강호조직을 ‘정부 밖의 정부’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에서 예전에 존재했던 각양각색의 강호조직은 사라졌지만 강호의 가치관과 풍습, 규범 등은 사회관습과 제도에 투영되어 면면이 중국인들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정식의 절차를 밟기보다는 ‘관시’(關係)를 더 중시하는 습성, 인정에 매달리는 일처리, 체면을 중시하는 관습 등은 유교문화의 부정적 단면이면서 강호의 가치관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중국 부모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자녀들에게 ‘사회의 일은 책에서 배울 수 없고, 책에서 배우는 것은 사회에서 쓸모 없다’, ‘정직하고 온후한 사람은 손해를 보기 쉽다’라는 말을 해 주는 것은 아마 자녀들이 당면할 냉엄한 강호사회의 규칙을 경고해 주고 싶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중국사회에 새로이 부각되는 강호화 현상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보시라이 전 총칭시 서기 사건 등에서 보듯이 권력자나 기업가, 폭력배들이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얽혀진 그들만의 조직을 통해 저지르는 대규모 부패와 범죄행위들이 옛 강호시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화되어가는 부패와 범죄의 건당 규모측면만을 고려해 본다면 오히려 강호화 현상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공권력을 비웃듯이 존재하는 권력자들의 수많은 사조직,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권력형 비리의 만연 현상 등이 중국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름대로의 긍정적 기능에도 불구하고 때로 지나치게 이권화, 권력화되어 가고 있는 갖가지 형태의 비정부조직의 모습에서 희미하게나마 청나라 말기의 강호조직이 연상되기도 한다.

중국이 일찍이 경험한 강호사회가 혹 우리나라에 망령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니 공연히 심경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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