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9년 11월 10일 개관한 한화기념관에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오른쪽 셋째)이 원로 임원들과 함께 한화 발전사를 표현하고 있는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
한화그룹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할 당시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의 산케이신문·로이터통신 등 해외 언론에서도 한화를 IMF를 딛고 선 대표적 기업, 가장 성공적으로 구조조정을 이룩한 기업으로 조명했다. 1998년 10월에는 정부로부터 구조조정 모범기업으로 인정받았고, 1999년 1월에는 청와대 무역투자진흥회에서 구조조정 우수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경영능력은 세간의 화제가 됐다. 수많은 굴지의 대기업들이 해체되던 중에도 김승연 회장은 외환위기에 대비해 한 발 빠른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당시 선친에게 물려받은 알짜 회사들을 매각하는 등 김승연 회장은 "마취도 않고 갈비뼈 하나를 들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며 회사를 살리는 데 전념해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이후 한화그룹 재도약의 밑거름을 깔았다.
![]() |
한화그룹 현암 김종희 창업회장. |
◆이리역 폭발사고를 '전화위복'으로
이런 문제 해결 능력은 선천적이다.
창업 25년 만에 15개 기업을 포용해 대기업군으로 착실한 성장을 다져나가던 한국화약그룹(한화그룹 전신)의 김종희 창업회장은 1977년 11월 11일 밤 이리(현재의 익산)역 폭발사고라는 뜻밖의 재난에 봉착해 출범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김종희 회장은 피해보상금으로 90억원을 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정부가 책정한 재해복구비 50억원의 두 배 가까운 금액이었다. 나중에 검찰 조사 결과 철도청의 과실로 드러났지만 김종희 회장은 "피해보상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거듭 강조했을 뿐이다.
이러한 김 선대 회장의 자세는 한국화약그룹의 이미지를 새롭게 부각시켰고, 이에 정부도 보상금을 3년 분할로 납부하도록 조치했다. 이후 한국화약그룹은 이리역 폭발사고의 후유증을 딛고 전열을 재정비해 1970년대 말에는 오히려 큰 폭의 성장을 이룬다.
김종희 회장은 이리역 폭발사고뿐만 아니라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베어링·PVC 공장 초기 경영의 어려움, 경인에너지의 설립, 제1·2차 석유파동과 과열경기의 진통, 정밀폭약 및 함수폭약 국산화 등 비장의 카드로 매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이 시기를 거쳐 한화그룹은 김종희 회장이 직접 그룹을 지휘한 1980년까지 석유화학산업과 기계산업 등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국내 10대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김 선대 회장이 30세에 창업해 29년간 그룹을 이루고 1981년 59세의 이른 나이에 별세한 후 29세의 약관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을 승계할 때 주위의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김승연 회장은 일부의 우려를 씻고 그룹을 고속성장시키며 '제2의 창업기'로 이끈다.
석유화학의 수직계열화를 염두에 두고 있던 김승연 회장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백억원의 적자에 허덕이던 한양화학을 인수했다. 그 후 불과 1년 만에 한양화학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후 한화그룹은 개혁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석유화학·기계·금융·유통 등 다양한 산업분야의 계열사를 확보하게 됐다.
![]() |
1969년 경인에너지 공장 착공식에서 첫삽을 뜨는 김종희 회장(왼쪽 둘째). |
◆외환위기 극복한 '구조조정의 마술사'
한화그룹에 1990년대 중반은 시련과 동시에 기회의 시기였다.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신속한 구조조정이 시련을 기회로 만들어 한화그룹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996년 10월 김 회장은 '혁명적 개혁'을 선언했다. 1980년대부터 진행됐던 개혁이 모두 실패했다고 선언하면서 백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자세로 21세기형 사업구조로 그룹을 재편할 것임을 밝혔고, 한화그룹은 1999년까지 선제적이고 급격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1997년 한화바스프우레탄을 독일 바스프사에 매각한 것이 첫 신호탄이었다. 한화는 이후 한화NSK정밀을 일본정공에, 한화GKN을 영국 GKN에, 한화기계 베어링사업부문을 독일 FAG와 합작 설립한 FAG 한화베어링에 각각 매각했다. 또 한화자동차부품을 캐나다 테스마에 매각하고, 그룹 매출의 40%에 육박하던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팔았다. 재계 자율 빅딜 방식으로 한화석유화학은 대림산업과 NCC합작사 여천NCC를 설립하고 일부 유화사업을 맞교환했으며, 한화의 의약부문을 분사해 에이치팜(현 드림파마)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부동산 등 자산 매각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2002년 말 한화생명(당시 대한생명) 인수는 한화그룹의 또 다른 퀀텀점프의 계기가 됐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몸집을 절반 가까이 줄였던 한화그룹은 내실경영을 바탕으로 한화생명 인수전에서 승리했다. 김승연 회장은 무보수로 대표이사에 취임해 인수 1년여 만에 한화생명을 생명보험업계 2위 자리로 올려놓았고 인수 당시 2조3000억원에 달하던 누적결손금을 2008년 완전 해소했다. 2010년 3월에는 주식시장에 상장함으로써 공적자금 회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글로벌 기업으로의 성장 기반을 굳건히 했다.
이처럼 한화그룹의 발전에는 김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김 회장은 1981년 선대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받을 당시에 비해 2011년 총자산이 101조6590억원으로 135배, 매출액은 35조950억원으로 32배, 당기순이익과 자기자본은 각각 163배·63배 이상으로 키웠다.
최근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불거진 상황 속에서도 김승연 회장은 태양광과 이라크 신도시 사업 수주 등 신성장동력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진두지휘하며 한화그룹의 실질적 성장을 이끌었다.
![]() |
한화 김승연 회장(오른쪽)이 2012년 7월 29일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수주 관련, 현장캠프를 방문해 현장 관계자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성공적인 공사수행을 당부하고 있다. |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