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3월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후임으로 취임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보통 사람들은 저를 온화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저는 동시에 신념과 주관이 뚜렷하며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해 봄 중국은 사스의 창궐로 몸살을 앓았다. 취임하자마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2004년 기자회견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시구인 '산이 깍아지른 듯하고 길이 가시덩굴일지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雄關漫道真如鐵, 而今邁步從頭越)'와 굴원(屈原)의 시구인 '아득히 멀고먼 길이지만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매진하겠다(路漫漫其修遠兮, 吾將上下而求索)'를 인용해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이 기간 중국은 10%를 넘는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글로벌 강국의 길에 성큼 접어들었다. 2005년 7월 중국은 고정환율제에서 관리변동환율제로 환율제도를 바꾸는 일대 조치를 취하며 개혁의 고삐를 당겼다. 2006년 3월 기자회견에서 그는 "우리 정부는 인민의 정부이며, 나는 한 명의 중국인이며 인민의 아들이다. 우리가 거둔 모둔 성과의 공을 인민에게 돌리겠다"고 말해 경제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2007년 3월 기자회견에서 그는 관자(管子)의 말인 "멀리 있는 친구를 사귀려면 우선 가까운 친구부터 사귀어야 하고, 화를 막기 위해서는 원한을 해소해야 한다(召遠在修近閉禍在除怨)"를 인용해 일본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렇지만 그는 퇴임 때까지 일본과의 앙금을 풀지 못했다.
2007년 하반기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닥쳤다. 경제위기가 세계를 엄습했을 상황인 2008년 3월 그는 5년 임기의 총리직에 연임됐다. 총리직 재임명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5년 전 저는 청말 임칙서(林則徐)가 말했던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생명이 대수겠으며 일신의 화가 문제겠는가(茍利國家生死以, 豈因國福避趨之)'라는 말로 포부를 나타낸 데 이어 지금은 왕안석(王安石)의 '하늘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거의 관습에 얽매이지 말며,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 않겠다(天變不足畏, 祖宗不足法, 人言不足恤)'는 말을 덧붙여 제 각오를 드러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원 총리의 태도가 너무 고집스러운 것 아니냐는 의견이 일기도 했다.
그해 5월 쓰촨(四川)성 원촨(汶川)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는 관료들에게 "인민이 당신을 키웠으니 이제 당신들이 잘 보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8월에는 베이징올림픽이 개최됐다. 2010년 2월 네티즌과 가진 인터넷 대화에서 원 총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날 때까지 우리집 다섯 식구는 9㎡ 남짓한 방 한 칸에서 함께 살았다"며 주택 보급 확대를 약속했다.
2010년 4월 칭하이(青海)성 위수(玉樹)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장 사고지역으로 달려간 그는 "이웃의 재난은 우리의 재난이며 이웃의 아픔은 우리의 아픔이다. 우리 모두 희생자들에게 진심어린 애도를 표한다"며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2011년 7월 원저우(溫州)에서 고속철 충돌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처리에 관한 정보 공개가 늦어지자 원 총리는 "단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100배의 노력을 가하라. 그리고 철도부 공무원들은 인민들에게 사실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기자회견에서는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을 두고 "그동안 많은 충칭의 지도자들이 지역을 발전시켜왔지만 최근 충칭 지도자들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해 보시라이에 대한 강도 높은 사법처리를 예고했다. 그리고 지난 5일 이뤄진 마지막 전인대 정부공작보고에서 그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같이 분투해나가자"는 힘찬 말로 보고를 끝맺었다. 연설을 마친 그는 2000여명의 인민대표들에게 깍듯이 세 번 인사를 했다. 중국에서 세 번의 인사는 최고의 예의와 존중을 뜻한다. 그리고 퇴임하는 원 총리를 위한 박수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